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3월 1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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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1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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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1일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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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

제1독서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저 녀석을 죽여 버리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7,3-4.12-13ㄷ. 17ㄹ-28

3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었으므로, 다른 어느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긴 저고리를 지어 입혔다.

4 그의 형들은 아버지가 어느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정답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12 그의 형들이 아버지의 양 떼에게 풀을 뜯기러 스켐 근처로 갔을 때,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네 형들이 스켐 근처에서 양 떼에게 풀을 뜯기고 있지 않느냐?

   자, 내가 너를 형들에게 보내야겠다.”

17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뒤따라가 도탄에서 그들을 찾아냈다.

18 그런데 그의 형들은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 그가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19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20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21 그러나 르우벤은 이 말을 듣고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 낼 속셈으로,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하고 말하였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다시 말하였다. “피만은 흘리지 마라.

    그 아이를 여기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져 버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마라.”

    르우벤은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 내어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낼 생각이었다.

23 이윽고 요셉이 형들에게 다다르자, 그들은 그의 저고리, 곧 그가 입고 있던 긴 저고리를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졌다. 그것은 물이 없는 빈 구덩이였다.

25 그들이 앉아 빵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보니, 길앗에서 오는 이스마엘인들의 대상이 보였다.

    그들은 여러 낙타에 향고무와 유향과 반일향을 싣고,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26 그때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27 자, 그 아이를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아 버리고,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자.

    그래도 그 아이는 우리 아우고 우리 살붙이가 아니냐?” 그러자 형제들은 그의 말을 듣기로 하였다.

28 그때에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가다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내었다.

    그들은 요셉을 이스마엘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에 팔아넘겼다. 이들이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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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복음 말씀

복음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33-43.45-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45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46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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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오늘 복음은 포도밭주인의 행동을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공들여 포도밭을 일구었는지 잘 드러내 주는 표현들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묘사가 확인하여 주는 것은 이 밭의 소유자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주인’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에게서 저항과 반역의 움직임이 생겨납니다. 주인이 자기 몫의 소출을 받으려고 종들을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을 죽여 버립니다.

  주인은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종들을 보내지만, 같은 소행이 되풀이됩니다. 주인은 끝까지 사랑과 신뢰로 자기 아들을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아들이야말로 소유권자이기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며 죽여 버립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을 죽이려 하는데, 그가 자신들을 제치고 아버지의 상속자가 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받는 사람에게 학대받거나 조롱당하는 일이 일어나니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세상을 만드셨고 살기 좋은 곳, 포도 열매가 잘 맺히는 곳으로 일구시어 우리에게 내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진심을 조롱하고 그분의 사랑을 회피하여 온 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이 중심을 잃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러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우리 포도밭의 주인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반역과 저항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를 되찾는 것이 사순 시기에 우리가 다시 세워야 할 삶의 질서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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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예수님 공생활 시작에 외치신 첫 메시지이자, 당신의 온 삶을 통해서 특히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온 인류에게 전하는 하느님 말씀이다. 이는 역으로 사람은 좀처럼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어떤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됐나보다고 말할까. 사람의 마음은 참 고집스럽다. 성경은 이를 목이 뻣뻣하고 마음이 완고하다고 한다.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아들 요셉의 인생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예형, 예고편이다. 요셉은 야곱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는 아버지 야곱의 첫사랑인 라헬에게서 얻은 첫째 아들이었다.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칠 년을 일했는데 그 칠 년을 며칠로 여길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창세 29,2). 요셉의 다른 형들은 그런 그를 시기했고 마침내 그를 죽이기로 하기에 이르렀다. 요셉은 잘못한 게 없다. 잘못이 있다면 순진해서 형들의 시기를 알아채지 못한 것이겠다. 그것도 아버지가 그를 특별히 사랑했기 때문이다. 요셉은 맏형 르우벤의 기지로 목숨을 구하고 이집트로 팔려 가게 됐다. 그런데 나중에 요셉은 이집트의 재상이 되었고 그 권력으로 아버지 야곱과 온 가족을 구원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시편 118,22-23).”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노래하며 하느님의 신비로운 구원 역사를 찬미했을 거다. 그러나 요셉은 예수님의 예형이고, 요셉의 이야기는 예수님 삶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요셉은 죄 없이 죽을 뻔했다가 살게 되고 파라오의 눈에 들어 재상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죄인이 되어 실제로 사형되셨지만 부활하셨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고 그렇게 인류에게는 구원의 길,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 열렸다. 죄인이라는 말이 듣기 불편하면 하느님에게서 멀어졌고,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되찾고, 아니면 완전한 사랑과 평화의 나라를 찾는다고 하자. 우리가 돌아가고 되찾고 새롭게 발견하는 그 길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좋은 일만 하셨는데 왜 그런 극형을 받으셨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왜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그토록 미워했을까?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외치셨다. 제발 마음을 바꾸라고 호소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음을 바꾸기는커녕 바라사이들은 헤로데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고(마르 3,6), 예수님을 심문하고서는 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그날 서로 친구가 되었다(루카 23,12).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러리라는 것을 아셨다. 세 번이나 당신의 그런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셨다.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속담처럼 사람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벗어날 수 없다. 예수님의 죄라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아버지가 당신을 사랑하심을 아셨다는 것이다. 간혹 자신이 고통을 받는 이유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 이를 두고 메시아 콤플렉스라고 부르는데, 가당치 않은 생각이다. 예수님의 고통은 죄없는 순수한 고통이고, 우리의 고통은 죄의 결과다. 잘못했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있고, 마음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받는 고통이다. 그래도 고통이 예수님 사랑 때문이라고 확신한다면 그 고통은 감미로울 거고 고통을 주는 이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거다. 그를 좋아하지는 못해도 안타깝고 안쓰럽게 여기게 될 거다. 자신은 예수님 자리에 그는 빌라도 자리에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예수님, 자신이 옳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이제 알겠습니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이라고 알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듣는 마음을 청했던 솔로몬을 좋게 보셨던 이유를 알겠습니다. 인내하며 듣고, 겸손하게 묻고, 지혜롭게 주님 목소리를 식별하게 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마지막까지 마음을 바꾸고 복음을 더 믿고 순종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 구속주회 한국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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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오늘의 주제는 ‘인간이 버린 사람을 하느님께서 귀하게 쓰시고,

인간이 죽인 사람을 하느님께서 살리신다.’로 해도 좋을 겁니다.

 요즘 들어서 우리 인간은 참으로 많은 것을 쓰레기로 만듭니다. 실로 얼마나 많은 것을 우리 인간이 버립니까?

그것을 저는 저희 아나바다 장터에서 실감하는데 전국에서 여러분들이 물건을 보내 주시는 덕분에 저희 장터는 성업 중이고 의미 있는 사업이 되었지요. 그래서 그냥 쓰레기가 될 것을 재활용할 수 있도록 협력해 주신 여러분에게 늘 감사를 드리고 있지만 마냥 좋게만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프란치스칸마저 신자유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신자유주의가 끊임없이 소유와 소비를 부추기는데 우리 프란치스칸들조차도 이 부추김에 넘어간 것입니다. 과거 우리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회 밖의 건전한 가르침들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을 욕심이라고 규정하고 우리 인간의 그 끝없는 욕망과 욕심을 억제하라고 가르쳤는데 신자유주의는 소유욕과 욕망들을 죄악시하지 말라고 부추기지 않습니까?

신자유주의는 그러면 왜 그렇게 합니까? 우리 인간의 행복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겁니까?

아니지요.

기업이 잘 돌아가고, 그래서 기업이 많은 이윤을 내게 하기 위해서지요.

 

부추김, 이것이 실은 창세기 뱀의 유혹입니다. 뱀은 아담과 하와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리킵니다.

너희가 다 가졌고 다 따먹는데 낙원 한가운데 저 나무 열매만은 못 따먹는 것 아니냐고 일깨우고 따먹으라고 부추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나무가 뭐냐 하면 바로 선악과, 곧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입니다.

그 열매를 따서 먹는 순간 하느님만 아셔야 할 선과 악을 인간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대로 생겨난 모든 것을 보시고 좋다고 하셨고, 그래서 선이란 하느님 좋으실 대로 된 것인데 그런데 인간이 자기 좋을 대로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 결과 바란 대로 된 것은 선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악이 된 것이며, 바란 대로 된 선 곧 좋아하는 것은 소유하고 바란 대로 되지 않은 악 곧 싫어하는 것들은 버려버리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중심적으로 소유하고는 버립니다. 더 좋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덜 좋은 것을 버려 쓰레기로 만들고, 새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쓰던 것을 싫증 내고는 쓰레기로 버립니다.

 

그런데 너무도 놀라운 것은 이 자기중심적 소유와 소비가 물건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기 욕망과 필요에 따라 인간마저 소유하고 버립니다. 욕망 때문에 애를 낳고는 성가시다고 애를 버립니다.

좋을 때는 사랑한다고 하고는 싫어지면 사랑을 버립니다. 하느님마저도 필요할 때는 소유하고 욕망의 순간이나 필요 없을 때는 버려버립니다. 그러나 사랑이신 하느님은 그렇게 버린 인간을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 인간이 버린 주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십니다. 좋아하고 소유하는 인간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 그 큰 차이를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묵상글, OFM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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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시편 105.4-5ㄱ)

 

오늘 3월 1일은 제105주년을 맞이하는 3.1절로,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 운동을 기념하여 제정된 대한민국의 국경일입니다. 일제의 통치로부터 한민족의 독립의 꿈이 한반도 전체에 활짝 꽃처럼 피어났던 날입니다. 또 오늘은 사순시기로 3월 첫날이자 ‘성 요셉 성월’의 첫날이자 마지막 3월 31은 부활대축일로 영적 황금기의 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난국에 처한 이 나라를 위해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회개로 정의와 평화의 꿈이 활짝 피어날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를 청해야 할 참으로 절박한 3월이라 하겠습니다. 여전히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온전한 독립은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어느 일간신문 1면 톱기사, “0.65명... 또 ‘최저’ ‘출구’ 없는 저출생”이란 커다란 활자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한민족도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대로 꿈이, 희망이 사라져 가는 나라 현실을 상징하는 듯했습니다. 개인이든 사회든 나라든 꿈이, 희망이 있어야 삽니다. 살아있는 자들만 꿈꿉니다. 죽어있는 자들은 꿈꾸지 못합니다. 2009년 15년 전 봄철에 써놨던 “살아있는 자들만 꿈꾼다”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

 

“살아있는 자들만 꿈꾼다

죽어있는 자들은 꿈꾸지 않는다

연초록 새싹으로

화사한 꽃들로 피어나는 꽃나무

봄꿈의 나무들

살아있는 자들만 꿈꾼다.”

 

숨 쉰다 하여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꿈이 있을 때 비로소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꿈꾸는 사람들만이 살아있는 영원한 청춘입니다. 예수님은 물론이고 모든 성인들은 하느님의 꿈이 꽃처럼 피어났던, 그대로 하느님의 꿈이 실현된 분들입니다. 역시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꿈이 실현되시길 바랍니다.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나이에 관계없이 오늘 제1독서 창세기의 요셉처럼 “하느님의 꿈쟁이”임을 깨닫습니다.

   교황은 “모든 사제는 요셉처럼 꿈꾸는 사람이 돼야 한다”라고 강조하면서, 꿈꾸는 사람은 현실과 동떨어진 몽상가가 아니라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 정의했습니다. 또 위대한 꿈을 꾸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어제 독일에 있는 수녀님으로부터 받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순절 단식 권고 내용을 읽으면서 교황님의 기발한 상상력의 가르침에 명실공히 하느님의 꿈쟁이임을 확인했습니다.

얼마나 멋진 참된 단식인지요! 영적황금기 3월 이런 단식으로 하느님의 꿈이 활짝 피어나는 꿈나무로 사시길 바랍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는 요셉을 통해 하느님의 꿈이 어떻게 실현되어 가는지 보여주는 시초입니다.

 

  “저기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느님의 꿈을 좌절시킬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 37장에서 시작되어 50장으로 끝날 때까지 요셉을 통해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어 가는 파란만장한 과정이 참으로 장관입니다. 요셉만이 아니라 성서의 예언자들은 물론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꿈쟁이였습니다. 예언자들이나 예수님을 정의하면 사랑의 시인, 신비가, 영성가, 관상가이자 활동가, 꿈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 역시 평생 꿈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으니 바로 “하느님 나라”가 그분의 평생 꿈이었고 이 하느님의 꿈은 우리를 통해 면면히 계승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평생 날마다 노래하는 시편 역시 하느님의 꿈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꿈이 가득 담긴 시편을 노래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시인이 되고, 하느님의 꿈은 우리를 통해 꽃처럼 피어나고 실현되리라 믿습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 요셉의 일화와 마태복음 21장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배치가 참 절묘합니다. 요셉은 그대로 예수님의 예표가 됩니다. 그대로 요셉의 수난은 그대로 복음의 비유에서 포도밭주인의 아들이 상징하는 예수님의 수난을 보여줍니다.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그대로 창세기의 요셉 형제들의 말과 오버랩됩니다. 세상 악의 세력들은 예나 이제나 하느님의 꿈을 좌절시키려 음모와 온갖 획책을 시도하지만 결코 하느님의 꿈을 좌절시킬 수 없음을 봅니다. 마침내 부활을 통해 당신의 꿈을 실현시킨 하느님이요 초대교회 신자들은 바로 다음 시편의 꿈이 예수님의 부활 승리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깨달았음이 분명합니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시편 118,22-23)

 

예수님 제자들의 시편을 렉시오디비나 한 솜씨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대로 이들의 영성의 깊이를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통해 당신 꿈을 꾸시고 실현시켜 나가십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꿈쟁이이자 꿈나무입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통해 당신의 꿈이 실현되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 당신의 백성이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선행에 힘쓰고, 언제나 주님의 보호를 받게 하소서.”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묵상글, 성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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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 낮에는 식당, 밤에는 술집을 운영하는 가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손님이 줄어 운영이 어려워진 것입니다. 주인은 며칠 간의 고심 끝에, 저녁에 자기 집에서 술을 마시면 다음 날 점심을 공짜로 주겠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요? 손님이 점점 몰려들어 장사는 나날이 잘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이 가게의 비밀이 밝혀졌습니다. 글쎄 저녁 술값에 다음 날 점심값이 이미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공짜를 좋아하면 도둑놈 심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해서 공짜만을 좋아하고 또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주님께 어떠합니까?

   우리 교회의 발전이 공짜로 이루어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봉헌이 있었고, 많은 순교자의 피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많은 신앙인 덕분에 우리 교회가 계속 발전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을 사는 우리는 계속 공짜 인생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그 어떤 노력 없이 세속적인 자기 욕심이 채워지길 바라는 기도의 연속은 아니었습니까?

공짜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대로 더 사랑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하늘나라에서 모두 갚아주시겠다고 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포도밭을 일군 다음 소작인들에게 맡기지요. 그리고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소출을 받아 오라고 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매질하고 또 죽이기까지 합니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역시 마찬가지의 악행을 저지릅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은 존중할 거라는 마음으로 보냈지만, ‘상속자인 아들을 죽여 버리면, 이 포도밭을 차지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립니다.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많은 예언자를 죽이고, 심지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이스라엘 사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지금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당연히 많은 것을 누려야 한다는 욕심과 이기심이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과 무엇이 다를까요?

    그 어떤 노력도 없이 세속적인 자기 욕심이 채워지길 바라는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못된 소작인의 모습이 아닌, 겸손한 삶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착한 소작인의 모습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으로 인정을 받고, 주님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님)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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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밭주인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 안에 감춰져 있는 욕심들, 아직 우리가 버리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깨우쳐 주십니다.

 저는 얼마 전에 이사를 했는데요. 이삿짐을 싸다 보니 어떤 거는 이제 좀 못 쓰니까 그리고 저에게 필요 없는 것이니까 이제 좀 버려야 될 것들도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좀 나눠줘야 될 것들도 있고, 그렇게 짐을 정리하다가 보는데 이거는 나한테 필요 없으니까 '다른 사람한테 줘야지 나눠야지.'라고 이렇게 한쪽으로 빼놨던 것들을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이렇게 보니 나한테 또 필요할 것 같은데 하면서 이렇게 이것도 한번 짐을 싸야 되나 손이 가게 되더라고요.

   결국 우리 마음속에서는 '내 거'라고 하는 것 '내 소유', '나의 것에 대한 욕심'이 자연스럽게 끊임없이 올라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착각하는 것은 내 것이 아닌데 사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모든 것들인데도 그것을 내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 원래 내 것이 아닌데 내 거라고 착각을 하다 보니 자꾸 무언가를 더 소유하고 싶어지고 그것을 남이 가지고 있으면 빼앗고 싶어지고 그러한 모습들이 오늘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 잘 드러납니다.

  또한 독서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요셉과 또 그의 형제들 사이에서 있었던 아버지가 이스라엘이 야곱이 너무나 형제들을 다 아들들을 사랑했지만 그중에서도 요셉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나머지 형제들이 질투하고 그래서 요셉을 미워하죠. 하지만 그 사랑은 아버지가 주시는 것이지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닌 거죠.

  근데 내 꺼라고 생각을 하다 보니까 '내 것을 요셉이 빼앗아 갔네.', '내 것을 요셉에게 빼앗겼네'라고 생각을 하고 요셉을 시기질투하고 또 미워하면서 결국 그를 없애버리면 다시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의 것들이 내 것이 될 거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포도밭주인의 비유 역시 마찬가지이죠.

소작농들 역시 자기 것이 아닌 것인데 자기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포도밭주인이 종들을 계속 보냄에도 불구하고 그 종들을 죽여버리면, 그리고 마지막에 포도밭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여버리면 이 포도밭이 포도밭 주인의 상속 재산이 나의 것이 될 거다라고 착각을 합니다. 원래 내 것이 아닌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사순 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 또 예수님의 죽음, 그 너머의 부활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사순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사순시기 동안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더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까?

그건 바로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 아니라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거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 이것이 첫 번째일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지금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이 모든 것들이 감사하게 되면 자꾸 남의 것을 내 거라고 착각하지 않고 빼앗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는 가벼워야 합니다.

더 많이 채우고 무언가를 소유하고 가지고 이 무거운 것들을 들고 하느님께 갈 수는 없습니다. 가벼워져야지만이 하느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오늘 하루에 감사하고 나에게 베풀어주신 그것이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 아니라고 인정할 수 있는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 그 마음으로 이 사순 시기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황중호 베드로 신부님 묵상글, 가톨릭 평화방송ㆍ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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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빕니다. 복음에 비유해서 소작인들은 포도를 재배하고 수확했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포도를 수확해서 주인에게 제때 출 소출에 일정 부분을 바쳤고 자기 몫을 가져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포도 재배가 잘 되고 수확량이 많아지니까 점점 욕심이 생겼겠지요.

욕심이 생기니까 주인의 몫을 돌려주기 싫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주인의 몫마저 자기의 소유로 하고 싶었습니다.

주인은 종들을 보내서 도조를 받아오게 했지만 그들도 종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협박하고 때리고 주인에게 돌려보내거나 죽이거나 하였습니다. 매해 이런 일이 벌어지니까 그들은 또 익숙해졌습니다. 주인이 종들만 보낼 뿐,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으니까 익숙해진 것입니다.

  그러던 중 이번 해에도 종들이 와서 도조를 달라고 하겠지라고 생각을 했는데 주인과 같은 신분인 아들이온 겁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그것을 그대로 상속받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작인들은 이 아들을 죽이면, 포도밭 전체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잡아죽입니다. 소작인들은 이제 자기가 주인의 아들이 된 것인양 기뻐했습니다.

포도밭을 모두 자기의 소유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빼앗기고 목숨마저 잃게 될 겁니다.

 포도라는 것, 오늘 비유의 '포도'라는 것은 하나의 선(), 좋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과일로도 좋고 포도주로서도 좋습니다. 특히 포도주가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편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께서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써 선한 것을 할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부님의 관점에서 보면, 로마서 3장 12절의 말씀인 '선한 일을 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라고 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가 선한 일을 하기에는 너무나 악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프란치스코 성인에는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서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선한 일을 할 수 있고 선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 좋은 것들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것이 아닙니다. 또한, 프란시스코 성인은 온갖 좋은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소유'라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소작인들은 포도라는 선한 것 좋은 것을 생산해 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의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목숨마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선하고 좋은 것들을 이루어내곤 합니다. 그런데 복음의 종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내가 한 것인양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쭐대고 으스대고 싶어 합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완전한 선에 가까울수록, 그것은 더욱더 나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입니다. 나에게 남겨두는 일 없이 주님께 선한 모든 것을 돌려드리도록 합시다. (이민우 유스티노 신부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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