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3월 2일 매일미사 독서 복음말씀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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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2일 매일미사 독서 복음말씀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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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일 매일미사 독서 복음말씀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2일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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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3월2일자 / 매일미사 오늘의 복음 묵상(클릭)>

매일미사 오늘의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보러가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OFM, 작은 형제회) 보러가기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묵상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복음 묵상 보러가기

이다한 스테파노 신부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2024년 3월 2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7,14-15.18-20

주님, 14 과수원 한가운데 숲 속에 홀로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

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시오.

옛날처럼 바산과 길앗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15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

18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19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20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을 성실히 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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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복음 말씀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돌아온 아들
현대판으로 재해석해 본 돌아온 아들 (E.필로테아 그림)

2024년 3월 2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알려 줍니다.

작은아들의 행동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멀어짐’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에서 ‘멀어지려고’ 자기 것을 챙겨 ‘먼 고장’으로 떠납니다. 그러나 이 멀어짐의 결과는 짐승보다 못한 삶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바라는 처지가 되어 버렸으니 말입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멀리서’ 다가오는 아들을 발견하고 오직 “가엾은 마음”으로 달려가 그를 껴안습니다. 그 어떤 분노나 훈계도 꾸짖음도 없습니다. 그저 열렬한 환영과 ‘받아 줌’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은 오늘 독서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미카 예언자는 선언합니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멀어진 존재를 돌아오게 하는 것은 ‘정직한 사랑’뿐입니다. 그리고 그 정직하고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기억하는 것이 곧 ‘회개’입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들어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발견하는 것, 그리하여 그 온전한 사랑의 원천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사순 시기가 우리에게 주는 은총입니다. 그분께 돌아갈 때 우리는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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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비유는 보통 탕자의 비유라고 하는데 실은 자비의 하느님 또는 하느님의 자비가 주제이고

그래서 자비의 하느님 비유가 제목으로 맞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비유에 나오는 세 사람을 소설이나 영화의 캐릭터 보듯 하나하나 다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비의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캐릭터입니다. 작은아들은 눈치나 상황을 보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거침없이 추구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굴곡 많은 캐릭터입니다. 큰아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과 요구되는 역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모범생이기에 굴곡은 없지만 억울한 캐릭터입니다. 

  먼저 아버지의 자비는 큰아들에게 보다는 작은아들에게 잘 나타납니다. 왜냐면 자비는 사랑 중에서도 죄인에 대한 은총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번 미사 때마다 통회의 기도 다음에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자비송을 바치고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큰 죄를 지은 작은아들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그는 은총의 사랑인 자비를 받습니다. 반면 큰 죄를 짓지 않은, 아니, 어쩌면 아무 죄도 짓지 않은 큰아들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또 늘 아버지 사랑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그는 은총의 사랑인 아버지의 자비를 받지 못하였다고 생각하고 동생처럼 자기 몫을 챙기지 못한 억울함,

동생처럼 방탕하게 살지 못한 억울함을 아버지에게 토로합니다. 이런 그에게 아버지는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그는 그 말을 제대로 잘 이해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 사랑에서 박차고 나날 용기도 없었고, 그렇다고 아버지 사랑을 늘 느끼지도 못했으며, 아버지 사랑 안으로 달려들지도 못해 억울한데, 그런 그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입니다.

 어쨌거나 아버지에게 큰아들은 애처롭고 안타깝기만 하지만 작은아들은 기쁨 곧 잃었던 아들을 되찾는 기쁨을 드립니다.

오늘 비유에서 아버지는 자기 몫을 챙겨 떠나는 작은아들을 붙잡지 않습니다. 강제로라도 자기 곁에 묶어두지 않고 자유롭게 떠나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하느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이 자유로 인간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을 떠나는 죄를 짓지만 이 자유로 하느님 사랑을 선택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큰 죄인인 우리를 자비로이 받아주시는 하느님 사랑에 감사해야 하지만 그 위험한 자유를 우리 인간에게 주시는 하느님 사랑에 더 큰 사랑에 더 감사케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OFM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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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홈페이를 열어 뉴스 확인하기가 겁납니다. 어디나 어둡고 불길한 뉴스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더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는 느낌도 듭니다. 다만 교황님 홈페이지는 가장 먼저 열어보는 살아 있는 영성의 보물 창고입니다. 늘 어둔 세상에 길을 열어주는 희망과 지혜의 빛 가득한 뉴스와 기사가 넘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한눈에 들어오는 여러 말마디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들어진 그리고

그리스도를 선포하라 불림받은 사람들”

“오늘날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은 믿고 선포해야 할 진리가 되었다.”

“‘성 이념(Gender ideology)’은 우리 시대의 가장 추한 위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자와 여자 모든 차이를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없애는 것은 인간성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대신 ‘남자와 여자는 풍요로운 ‘긴장’ 가운데 존재한다(Man and woman exist in a fruitful ‘tension’).” 성 이념에 종지부를 찍는 얼마나 지혜로운 통찰인지요!

오늘의 다산 어록과 맹자의 사단설도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사랑은 고차원의 덕목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다산'

'가엾이 여기는 마음,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이런 사랑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맹자'

 

오늘 복음은 늘 들어도 늘 새로운 복음 중의 복음, ‘순복음(pure Gospel)’이라 칭하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보다는 ‘너무나 자비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비유’라 함이 적절할 것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이처럼 감동적인 예화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묻고 싶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복음이라 이 복음을 대하면 늘 넘치는 감동과 더불어 저절로 “나는 누구인가?” 묻게 되며 오늘은 부끄럽다는 생각이 가득 들었습니다. 떠오르는 루가복음의 결론 같은 가르침을 확인하게 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루가 6,36)

 

우리의 평생과제가 부여되니 바로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교회는 어머니이며 우리는 형제”라고 아우구스티노는 갈파했습니다. 그러니 형제들인 우리가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마땅한 일이겠습니다. 자비하신 아버지하면 정주와 환대의 요셉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이 생각납니다. 제 좋아하는 두 편의 자작시입니다. 24년 전 감동을 담은 “아버지 산처럼”이란 시입니다.

늘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환대하는 아버지를 닮은 불암산같은 요셉 수도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의 짧은 시입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침묵의 저녁 불암산!” 한량없이 크고 깊고 고요한, 자비하신 아버지의 사랑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이 시를 썼을 때의 감동도 생생합니다. 바로 오늘 루카복음의 자비하신 아버지는 이런 산같은 분입니다. 제1독서 미카 예언자가 고백하는 하느님도 이런 자비하신 아버지와 일치합니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바로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오늘 복음의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아버지입니다. 제 고백상담 집무실벽에 수십 년 동안 걸려있는 바로 귀환한 작은 아들을 맞이하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렘브란트 그림입니다.

자비하신 아버지의 사랑의 절정은 삶의 밑바닥까지 갔다가 거지가 되어 생환한 작은 아들의 환대에서 감동적으로 드러납니다. 일체의 책임 추궁은 말끔히 사라지고 잃었던 아들을 찾음에 너무나 기뻐 얼싸안고 환호하는 아버지의 입에서 은총의 폭포수같이 쏟아지는 종들을 향한 명령입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존재감 없는 거지같은 신분에서 왕자같은, 아버지의 자녀로서의 존엄한 품위의 신분을 회복한 작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자비하신 아버지께 돌아오지 않고 존엄한 품위를 상실한 채 존재감 없이 무명의 거지처럼 세상 속에 살다가 불쌍하게 죽어가는 작은 아들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는 당신 외아드님을 통해 날마다 작은 아들같은 우리의 귀환을, 생환을 환영하시며 미사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작은 아들의 환대 잔치에 불타오르는 질투에 제정신을 잃고 분노하는 큰 아들 역시 소위 잘 산다 자부하는 우리의 위선을 폭로하면서 우리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자녀답게 산 큰 아들이 아니라 종처럼 살았던, 마음은 아버지에게서 멀리 떠나 있던 아버지와의 신뢰 관계가 참으로 빈약했던 큰 아들입니다. 수십 년간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 정주가 아닌 생각없이 타성적으로 안주하다 보면 우리 또한 이런 큰 아들이 될 위험성도 다분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큰 아들의 속내가 환히 드러납니다. 너무 화가 나니 말에는 사실과 어긋난 과장과 왜곡도 심합니다. 아우가 아닌 저 아들이라 하며 아버지와 작은 아우를 하나로 몰아붙입니다. 큰 아들의 태풍같은 분노를 미풍으로 바꿨을 다음 자비하신 아버지의 온유하고 진실한 말씀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네 것이다.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복음사가는 큰 아들의 반응은 물음표로 남기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며 반응을 묻습니다.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큰 아들, 작은 아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참으로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은 자녀다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가장 효성스러운 아들인 예수님 당신을 삶의 본보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복음을 묵상할 때마다 자비로운 아버지의 효성스러운 아들로서 자신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했을 것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자비하신 아버지의 효성스러운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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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무한히 사랑하시고 끝없이 자비를 베푸신다. 사람들에게서는 받을 수 없는 사랑과 자비라서 예수님은 비유가 아니고서는 설명하실 수 없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아니고서는 그것을 증언할 길이 없으셨을 것 같다. 외아들을 희생시킬 정도로 나를 사랑하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 하느님이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경험할 수 없으니 믿을 수밖에 없다.

  어떤 이는 하느님을 공기 같다고 한다. 공기는 보이지 않고 당연하게 여기지만 공기가 없으면 살 수 없다.

그처럼 하느님이 세상을 향해 숨쉬기를 그치면 사람은 살 수 없거니와 모든 게 한순간 허무로 되돌아가 버린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에나 계시지만 지옥에만은 안 계신다. 하느님이 안 계신 곳, 사랑과 자비가 없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생존을 위해 전쟁처럼 살고, 서로 믿지 못하고, 처벌의 법 규정만 내세우는 곳이 바로 그와 같다. 사람은 신뢰하고 사랑하며 서로 도우며 산다.

  죄는 악행이라기보다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떨어져 나감이다. 하느님과 분리되면 사람은 자신의 본성에 의지하게 된다. 더 이기적이고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된다. 그리고 죽음을 잊으려고 죽도록 일한다. 죽음과 불안의 노예로 살아간다. 세상은 정글처럼 된다. 잡아먹어야 살고 약하면 잡아먹힌다. 미아와 가출 청소년처럼 손쉬운 먹잇감은 없을 거다. 미아는 부모 품으로, 가출 청소년은 가정으로 되돌아가야 산다. 사람은 하느님 품 안에 있어야 산다. 숨 쉬듯 하느님이 그렇게 자연스러워야 한다.

  오늘 복음은 유명한 ‘되찾은 둘째 아들(루카 15,11-32)’ 혹은 돌아온 탕자의 비유다. 그런데 제목과는 달리 주인공은 속도 없이 선하신 아버지다. 그리고 이 비유는 세리와 죄인들이 아니라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 하신 이야기다(루카 15,3). 미아와 가출 청소년에게는 부모를 찾고 가정으로 되돌아가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죄인들은 예수님과 한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었으니, 그들은 살았다. 그러나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그 이야기의 첫째 아들처럼 예수님의 그런 후한 처사, 불법행위를 투덜거렸다. 그들은 죄인만 아니라 하느님도 자신에게서 분리했다. 율법에 가려져 하느님을 잊어버렸고, 그래서 자신 안에 있는 사랑과 자비를 잃어버렸다. 죄인들은 하느님 품을 떠나 죽었다가 되돌아와 살았는데 그들은 여전히 하느님과 멀어진 채로 스스로 의롭고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고 있다. 우리 모두 죄인이다. 부모 품을 찾는 미아고, 정글 같은 세상 속에서 안전하고 따뜻한 가정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가출 청소년 같다. 나도 너도 다 그렇다. 그러니 서로 따뜻이 반긴다. 집 안에 계신 아버지가 나를 달래러 밖으로 나오시게 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줍니다. 주님을 보게 해달라고 청하지 않고 믿음을 더해달라고 청합니다. 제게는 주님의 계명이 있으니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저보다 훨씬 똑똑한 수많은 성인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계명입니다. 계명을 지켜 주님이 제게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되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저를 영원히 도와주신다고 믿습니다.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묵상,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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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정에서 할머니들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한 할머니가 아주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 며느리가 요즘 성당에 다니는데, 글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다고 하대.” 이 말을 들은 다른 할머니들이

“아이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험하게 죽었대?”라고 묻자, 할머니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어. 글쎄 우리 며느리가 매일 십자가 밑에서 가슴을 치면서 ‘제 탓이오’를 외치는 거야. 이 모습을 보니까 며느리가 이 죽음에 크게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어떻게 하지? 신고해야 할까?”

 

   잘 몰라서 하는 대화일 뿐입니다. 그러나 잘 아는 사람은 며느리의 모습을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우리의 죄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죄 많은 우리 역시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 스스로 당신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철저히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간다면 과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의 죄악이 죄 없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제 큰 탓이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탓이지만, 주님께서는 자기 탓을 외치면서 울고 있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특히 우리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잘 알고 계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죄에 쉽게 빠져드는지, 또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얼마나 방황을 많이 하는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회개의 삶을 살 것을,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본받아 이웃에게 실천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래야 당신 십자가가 온 세상에 널리 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 말씀을 봅니다. 재산을 나누어 받고 나간 작은아들의 모습이 집중되어 있지만, 사실 이 비유 말씀에는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작은아들은 잘 아는 바와 같이 집을 떠나서 방황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집이 얼마나 좋은지를 깨닫고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큰아들 역시 방황 중입니다. 집 안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가치를 모르고 스스로 얽매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방황하는 우리입니다. 외적으로도 방황하지만, 내적으로도 큰 방황의 삶을 삽니다.

아버지 집이 그렇게 좋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품에서 벗어나 세속적인 삶만 살려고 하고 있으며, 아버지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얼마나 좋은지를 모르고 불평불만만 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방황을 멈추고 이제 주님을 바라봐야 할 때입니다.(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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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탕자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우리가 오늘 복음에서 들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비유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로 꼽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은 아들의 귀환, 그리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따뜻한 환대와 자비로 그를 받아들인 아버지의 모습은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지금도 계속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온유를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비유에 등장하는 또 다른 인물, 큰아들에도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작은아들과는 달리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작은아들처럼 방종한 생활을 하지도 않았고, 아버지를 섬기며 열심히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작은 아들 곧 자기 동생이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잔치가 베풀어졌다고 하자 오히려 화를 냅니다. 자기 동생의 귀환이 그에게는 아무런 기쁨이 되지 않았습니다. 큰아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그는 자기 동생을 동생, 아우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그냥 '저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떠난 적이 없지만 그의 모습은 뭔가 같은 가족이 아닌 사람, 낯선 사람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럼 그에게 아버지는 작은 아들에게 보여줬던 것과 똑같은 온유함으로 다가가서 그를 타이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큰아들의 화를 더 돋웠습니다.그는 왜 자기가 화가 났는지를 털어놓으면서 자기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겼고 아버지의 명도 어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아버지 곁에 있었고, 아버지의 말씀도 들었지만 정작 '아버지의 사랑'은 배우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의 수고에 대한 합당한 보상만을 요구하면서 동생을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 환대에서 끌어내리는 것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작은 아들만이 아니라 큰아들 역시도 아버지에게는 또 다른 의미에서 잃었던 아들, 죽었던 아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의 몸은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아버지에게서 또 아버지의 사랑에서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마음과는 달리 동생을 용서하거나 환영하지 않고, 그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큰아들이 어떻게 됐는지 곧 생각을 고치고 잔치에 참여했는지, 아니면 계속 밖에 있었는지, 말씀하지 않으신 채 일종의 '열린 결말'로 이 비유를 끝내십니다.

 

큰아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몸은 성당에 전례 안에 또 본당이나 교회, 단체, 교구에서 하는 각종 모임과 행사에 있지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 또 복음의 가치에서 멀어진 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아울러 아버지가 그런 큰아들을 내쫓지 않고, 그에게 다가간 것처럼 하느님은 선한 이들만의 하느님, 활동하는 신자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는 이러한 하느님의 참된 모습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면서 신뢰를 갖고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늘 그분께로 되돌리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우리의 존재,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늘 그분을 닮아가고 그분께로 돌아갈 수 있도록 신뢰 안에서 주님께 위탁하면서 이 시기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보다 더 참된 하느님의 모습을 늘 닮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십사 하고 또한 이 미사 중에 함께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다한 스테파노 신부님 미사 강론,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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