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3월 13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오늘의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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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13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오늘의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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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3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13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13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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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3일(수) 매일미사 제1독서

2024년 3월 13일(수) 매일미사 복음

매일미사책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의 묵상] 보러 가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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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3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땅을 다시 일으키려고 내가 너를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9,8-15

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9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10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11 나는 나의 모든 산들을 길로 만들고 큰길들은 돋우어 주리라.

12 보라, 이들이 먼 곳에서 온다.

보라, 이들이 북녘과 서녘에서 오며 또 시님족의 땅에서 온다.

13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14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15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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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3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수요일 복음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30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17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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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3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극한의 절망 속에서 부르짖는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 선언하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어머니와 자녀는 같은 살과 피를 나눈 관계이므로 결코 서로 잊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보다 더 강한 유대가 바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임을 선언합니다. 특별히 복음에서는 이러한 유대가 아버지와 아들의 ‘동질성’으로 드러납니다. 아들이 이 세상에 온 이유는 아버지의 일을 하기 위해서이고, 따라서 아들의 일은 곧 아버지의 일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오늘 본문 내용 바로 전에 벳자타 못에서 일어난 치유 사건으로 유다인들이 분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그렇게 친밀한 사이로 규정한 적이 없는데 감히 하느님과 자신을 ‘부자’ 사이로 이야기하고 심지어 ‘동질성’까지 선언하니 불쾌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오늘 독서에는 ‘어미와 젖먹이’의 관계보다 더 긴밀한 관계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맺는 관계 가운데 가장 치열하고도 에너지가 집중적으로 요구되는 관계가 부모와 자녀 관계입니다. 최고의 사랑과 희생,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보다 더한 사랑을 우리에게 가지고 계시고,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완성됩니다. 무엇보다도 큰 사랑이기에 가장 큰 고통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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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이사야서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시온에게 하느님께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라고 대답하고,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다시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런 엇박자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은 사랑하셨다고 하는데 인간은 그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고, 하느님은 은혜의 때에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의 날에 도와주셨다고 하는데 인간은 그 은혜를 받은 적이 없고 그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온만 이런 것이 아니고 사실 많은 경우 우리 인간은 이렇습니다.

고통이 극심할 때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 고통일 뿐이고, 고통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그 은혜를 그때는 느끼지 못하여 버림받았다고 하다가 나중에 가서야 은혜로 느끼곤 합니다.

사랑과 고통의 불일치요 때의 불일치인 겁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이런 우리 인간의 불일치와 달리 아버지 하느님과 당신 사이의 일치를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해 주님 친히 이렇게 정답을 말씀해주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그러니까 주님의 관상적 믿음이고, 믿음의 관상 때문입니다.

먼저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런 믿음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지 않는 관상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은 다 사랑이라는 믿음이 있고, 그래서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 벌어져도 그것이 바로 은총임을 봅니다.

그리고 벌어진 일들과 그 일을 벌인 인간들을 볼 때 그것들에 의해 현혹되지 않는 하느님 관상을 하기에 그것들로 인해 실망이나 절망이나 포기를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그 생명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여태 사랑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은 여태 사랑입니다.

여태 사랑은 중단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여태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좌절감이나 절망감 때문에 중단치 않는 사랑입니다.

내 사랑을 배신하는 그 인간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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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예수님을 통한 구원과 영생은 매일 우리 눈앞에 선물처럼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무상으로 베푸신 선물이 있는데, 그것은 너무나 큰 것이어서, 믿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바로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놀랍게도 그 선물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 공평한 선물입니다. 마치 눈이 그 어디든 골고루 내리듯, 아침 서광이 세상 방방곡곡을 고루 비추듯, 그렇게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선물을 주고자 하는 쪽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끝까지 거부하고 도망가는 사람에게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아침이 되어 밝은 태양 빛이 비칠 때, 온몸으로 만끽하지 않고, 두꺼운 커튼으로 창을 막아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동족 유다인들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유다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로 고위층 인사들, 나름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 율법의 대가들로 자칭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도 부족할 터인데, 그들은 예수님을 범법자로 몰고 갔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위반한 죄, 신성 모독죄를 들이대며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너무도 쉽게 선물을 받아안고 기뻐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가난하고 고통받던 백성이었습니다. 천대받고 무시당하기를 밥 먹듯이 하던 세리와 창녀, 죄인들이었습니다. 비록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단순하고 소박했던 그들은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분께서 선포하시는 말씀 앞에 의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꺼이 수용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살아생전 하느님을 뵙는 지복직관의 은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오늘도 예수님을 통한 구원과 영생이 매일 우리 눈앞에 선물처럼 펼쳐지는데,

우리 스스로 눈을 막고 돌아서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수시로 주님 축복이 우리 머리 위로 폭포수처럼 내려오고 있는데,

그것을 피하려고 어둡고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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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믿는 하느님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아버지라고 부르셨던 바로 그분이시다. 하지만 하늘에 계신 그분은 아버지, 땅에서 그분을 부르시는 분은 아들, 하느님과 예수님의 이 부자 관계는 우리들이 알아듣기 쉽게 표현한 은유고 비유다. 하느님이 실제로 성모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낳았다는 뜻이 아니다.

 

    자녀들은 부모님의 얼굴뿐만 아니라 성격과 성향까지 모두 닮는다. 하지만 자녀가 곧 그 부모는 아니다. 비슷하지만 다르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다. 오늘 복음에서는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요한 5,22).” 그러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요한 5,30).”라고 말씀하신다. 또 착한 목자 이야기를 하실 때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하시고 또 제자들에게 당신이 떠남을 기뻐하라고 하시며 그 이유가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시기 때문(요한 14,28).”이라고 말씀하신다. 두 분의 관계를 정확히 설명할 말이 세상에는 없다. 그래도 말하라면 두루뭉술하게 ‘서로 사랑하는 관계’라고 하겠다. 그런데 인간의 사랑은 믿을 만하지 못하니 이 또한 옳지 않다.

   예수님의 아버지 사랑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하느님은 아들을 희생시킬 정도로 세상을 사랑하신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구원받는다. 그 사랑, 두 분의 그 지독한 사랑을 믿어서 구원된다. 세상살이 중 가장 어려운 일은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거라고 한다.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소통하지 못하고, 믿었다가 상처 입고, 받은 만큼 주지 못한다. 우리는 완전한 신뢰, 변하지 않고, 세상에 그와 나만 있는 것처럼 친밀하고, 헤어짐이 없는 그런 관계를 원한다. 나도 너도 그걸 원하고 또 서로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관계는 이 세상에 없다. 그나마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이 그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하느님은 약속하셨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그분을 믿고 신뢰해도 된다는 이보다 더 확고한 선언은 이 세상에 없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부른다면, 십자고상을 바라볼 때마다 ‘하느님은 완전히 믿어도 되고, 내가 그분께 등을 돌리지만 않는다면 그분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나보다 당신이 훨씬 더 나와 친해지기를 바라시고, 그 관계는 영원할 수 있음’을 믿는다. 그래서 우리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다. 외로운 인생길, 긴 순례길의 영원한 동반자시다.

   예수님, 홀로 있는 시간은 외로움이 아니라 고독입니다. 그것은 혼자가 아니라 주님과 홀로 단둘이 있는 시간입니다. 저 혼자만 주님을 찾고 말씀드리는 것 같아 이상하지만 제 마음은 따뜻해지고, 때로는 아무 변화도 없이 지독한 어둠 속에 있지만 마음은 대낮처럼 밝아집니다. 좋은 친구 관계와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릅니다. 이 이상한 관계가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힘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가 계시니 이렇게 짙은 안개 속을 걸어가는 저의 순례가 두렵지 않습니다.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신부님, 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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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은 성 요셉 성월이자 은총과 회개의 사순시기입니다. 3월31일 부활 대축일까지 부단한 회개를 통해 하느님 중심의 삶에 더욱 충실할 수 있는 참 좋은 시간들입니다. 문득 어제 어느 노정치가에게 방송시 언뜻 들은 삼실(三實)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진실(眞實), 절실(切實), 성실(誠實)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 세말마디는 그분의 지론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하느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려는 사람이라면 삼실의 삶에 이어 삼감(三感)의 사람이 되어야 하나 삼망(三望)의 사람이 되어선 안될 것입니다.

감사(感謝), 감동(感動), 감탄(感歎)의 삼감(三感)이라면, 절망(絶望), 원망(怨望), 실망(失望)이 삼망(三望)입니다. 참 감사하고 신기한 것은 제가 여기 요셉 수도원에 만36년 동안 정주하면서 막막하고 답답했을 때는 있었어도 결코 삼망(三望)한 적은 한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하느님 믿음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다면 삼망(三望)은 도저히 있을 수 없습니다. 막막하고 답답할 때 참 많이 바라봤던 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이었습니다. 자주 되뇌었던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말마디였고, 이어 참 많이도 인용했던 “하늘과 산”이라는 제 자작 애송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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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1997.2)

 

무려 27년전 시이지만 읽을 때마다 늘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하늘이 평생 도반인 하느님을 상징한다면 산은 저를 상징합니다. 하늘과 산의 관계는 바로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과연 날로 신뢰와 사랑 깊어지는 하느님과의 관계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아, 여기가 천국입니다.”

아름다운 수도원 경관에 부러워하는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닙니다. 환경이 좋아서 천국이 아니라,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공동체 형제들과의 관계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불편하고 힘든 남남만도 못한 관계라면 거기가 연옥이요 지옥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입니다. 공동체내에서 관계의 훈련, 신망애(信望愛)의 훈련에 공동기도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이란 물음만 있고 하느님이란 답이 없으면 평생 헤매게 됩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과의 관계의 모범이 제1독서의 주인공 이사야 예언자이고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하느님은 아버지로 더 구체성을 띄게 됩니다. 3월 사순시기는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해야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참된 영성의 표지가 겸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은 얼마나 좋은신 분인지요! 은총의 사순시기에 참 적절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마음에, 사랑에 정통한 이사야 예언자의 참 아름다운 고백시입니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 주었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이런 아름다운 자연과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니 인공지능이 판치는 세상입니다. 영적 진보라기 보다는 인간 공동체 정신의 퇴행, 영성의 쇠퇴를 보여줍니다. <녹색평론 185호 2024년 봄호>의 특집은 “인류는 인공지능 시대를 건너갈 수 있을까”였습니다. 인공지능이 추세라 하지만 저에게는 “판도라의 열린 상자”처럼 웬지 인류의 미래가 불길하게 느껴집니다.

  정말 시를 쓰려면 하느님의 예언자이자 시인인 이사야처럼 이런 희망과 생명, 빛이 넘치는 구원의 시를 써야 할 것입니다. 평생 도반이자 평생 착한목자이신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과 깊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에 있는 참사람의 원형 이사야 예언자요, 예언자의 다음 하느님 사랑의 고백은 절정(絶頂)이자 절창(絶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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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나는 너를 결코 잊지 않는다”

못박듯한 하느님의 고백은 얼마나 절절한지요!

바로 우리 하나하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깊이는 이렇도록 깊습니다. 여기서는 하느님을 어머니로 지칭하는데 어머니를 능가하는 “사랑의 어머니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어머니로 비견되는 하느님에 이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주저함없이 아버지로 고백합니다. 예수님 덕분에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밀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깊이할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원대한 평생목표가 하나 있다면 하느님 중심의 “하닮의 여정”에, 하느님을 날로 닮아감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날로 깊어지는 일치의 관계일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고백을 과감히 나의 고백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보여주신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모든 말씀에 앞서 반드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말마디가 강조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독보적인 관계의 깊이를 지닌 아들 예수님의 확신에 넘친 고백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날로 가까워지는 관계가 높은 자존감(自尊感)에 자긍심(自矜心)을 지니고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느님 중심의 “하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3월 성 요셉 성월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예수님의 양부로서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부성(父性)과 하느님 어머니의 모성(母性)을, 양성(兩性)을 겸비한 참으로 온전한 요셉 성인처럼 생각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기르시는 아버지시오,

정결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시며,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신

성 요셉께 간절히 청하오니,

하느님께 빌어 주시어,

저희가 예수님을 사랑하며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또한 죽을 때에 저희를 지켜 주소서.” -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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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과 의사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늦은 밤에 마음의 병으로 고통받는 여성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여자는 이제 곧 자살할 것이라면서 자기의 지금 어려움을 이야기했습니다. 프랭클 박사는 새벽까지 이 여성과 대화를 나눴고, 그녀가 삶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들을 하나하나 제시했습니다. 긴 설득 끝에 이 여성은 목숨을 끊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나중에 이 여인을 만난 빅터 프랭클 박사는 그가 제시한 여러 가지 근거 중에 어떤 것이 그녀의 결심을 번복하게 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녀는 “그것 중에는 그 어떤 것도 제게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대신 결심을 번복하고 다시 힘을 내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녀를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오랫동안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프랭클 박사의 자세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자세가 마음을 바꾸게 했고 자기 삶을 살 가치가 있음을 이해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단순히 말로써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면서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자세에서 힘을 얻게 되어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결코 혼자가 아님을, 나의 말도 귀 기울여 주는 함께하는 누군가가 있음에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늘 함께하는 주님의 존재를 느끼는 삶이 필요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말을 들어주시고, 당신의 따뜻함 품으로 안아 주십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주님께서 안식일을 어기셨던 것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이라고 해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멈춰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시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지금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죽이려는 이유만을 찾습니다. 율법의 핵심이 사랑임에도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니,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합니다.

    주님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 자체를, 즉 있는 그대로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 삶 안에서 늘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그 사랑을 알아보는 사람만이 큰 힘을 얻을 수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조명연 마태오 (빠다킹)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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