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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4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오늘의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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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14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오늘의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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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4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14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오늘의묵상

 

2024년 3월 14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오늘의 복음 묵상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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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4일 목요일 제1독서

2024년 3월 14일 목요일 복음

매일미사책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의 묵상] 보러 가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보러 가기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진훈 코페르티노의 요셉 신부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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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4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제1독서

독서

주님,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32,7-14

그 무렵

7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어서 내려가거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

8 저들은 내가 명령한 길에서 빨리도 벗어나, 자기들을 위하여 수송아지 상을 부어 만들어 놓고서는, 그것에 절하고 제사 지내며, ‘이스라엘아,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 하고 말한다.”

9 주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10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 그리고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11 그러자 모세가 주 그의 하느님께 애원하였다. “주님,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큰 힘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당신의 백성에게 진노를 터뜨리십니까?

12 어찌하여 이집트인들이, ‘그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해치려고 이끌어 내서는, 산에서 죽여 땅에 하나도 남지 않게 해 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시렵니까? 타오르는 진노를 푸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13 당신 자신을 걸고, ‘너희 후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땅을 모두 너희 후손들에게 주어, 상속 재산으로 길이 차지하게 하겠다.’ 하며 맹세하신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

14 그러자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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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4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목요일 복음

 

복음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온 모세이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31-47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31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32 그러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34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35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36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37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38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40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41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42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44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45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온 모세이다.

46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47 그런데 너희가 그의 글을 믿지 않는다면 나의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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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4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수녀님 묵상 제목

 오늘 복음에는 ‘증언’이라는 말이 열두 차례나 나옵니다. ‘증언’은 어떤 사건이나 사람, 사물에 대한 ‘사실’을 확인하여 주는 행위를 말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한 여러 본보기를 차례로 이야기하고, 더불어 이 증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본보기를 열거합니다. 이 내용들은 우리 현실과 매우 비슷합니다. 특별한 설명 없이도, 문장 하나하나를 그대로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깊은 묵상으로 이어질 수 있을 듯합니다.

“너희는 ……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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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히 ‘성경’에 대한 경고는 매우 노골적입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성경을 연구하고 교의에 정통한 신학자라고 하여 모두 하느님과 가까운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연구하며 주로 만나는 것은 이론과 학설이지 하느님의 실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러한 우리의 곤혹스러운 현실을 “자기들을 위하여 수송아지 상을 부어 만들어 놓는” 우상 숭배로 고발합니다.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치장과 기교, 위선과 과시로 “자기들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한다면 모두 우상 숭배이며 죄입니다. “큰 힘과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고 “당신 자신을 걸고 …… 맹세하신” 하느님을 내 삶의 실제 주님으로 고백하며 이를 정직하고 충실하게 증언하는 것만이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시계 하는 진정한 구원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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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제목3
양승국 신부님

 

우리의 좌절과 깊은 상처에 눈물 흘리시는 하느님, 나를 위해서라면 당신 목숨까지 내어놓으실 하느님!

사랑은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실체요 근원이신 분, 사랑 빼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신 분, 우리의 하느님께서도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계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특강을 다니다가 때로 교우들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신부님들을 만납니다. 교우들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하루 해가 짧습니다. 머릿 속에는 언제나 교우들의 신앙을 성장시키고자 하는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 그것을 실현시키려니 몸은 또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한낫 인간인 사제들도 이렇게 사랑이 많으신데, 사랑의 본질이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그 사랑이 얼마나 더 뜨겁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어제도 지금도 내일도 활활 불타오르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이런 분이 아닐까요?

설명글

하느님께서 지니신 속성 가운데 가장 우세한 속성은 아무래도 한없는 너그러움이요, 세상 말랑말랑한 부드러움이 아닐까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포함한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찌 그리도 하느님의 속성과는 크게 대비가 되는지 씁쓸하고 서글픕니다.

하느님께서 총애하시고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들의 행실을 보시고 크게 개탄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 그리고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이스라엘 백성의 목이 워낙 뻣뻣하고 마음이 완고하다 보니, 부드럽고 섬세한 하느님의 사랑이 스며들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목디스크로 뻣뻣해진 제 목도 크게 걱정이 됩니다. 아무튼 마음이 사라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물, 진정성이 배제된 그들의 예배에 하느님께서 진노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느님은 분노에 더디신 분, 우리의 죄와 악행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사랑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중재자 모세의 당부에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즉시 거두셨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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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신부님 제목4
김찬선 신부님
김찬선신부님 강론제목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에 관해 증언하는 것이 많다고,

곧 성경도 증언하고, 모세도 증언하고, 요한도 증언하고,

아버지께서도 증언하시고, 당신이 하신 일들도 증언한다고 하시며,

그런데

그 많은 증언을 듣고서도 사람들이 당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고 한탄하십니다.

 

그러시면서 그들의 잘못과 죄상을 나열하십니다.

- 다른 사람은 받아들이면서

   당신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 아버지의 말씀이 자기들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 성경이 증언하는 당신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하느님께 영광을 받으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저는 그중에서도 다음 말씀이 특히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왜냐면 200주년 성서와 영어 성서를 보면 이 말씀이 조금 다르게 번역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I know that you do not have

  the love of God in you.”

그러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느님의 사랑”을 풀어서 번역한 것 같은데, 제 생각에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직역하는 것이 실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없을 때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없고, 반대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을 때 하느님을 우리가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관련하여 저의 죄를 성찰할 때, 제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죄보다 제가 하느님 사랑을 잘 받지 못하는 죄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내가 나의 사랑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주실 때 그 사랑을 내가 잘 받는 것이 우선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내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는데

이런 강박관념은 제가 보기에 우리의 주제를 넘어도 한참 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받는 것이 엄마를 기쁘게 하고 엄마를 사랑하는 겁니다.

그런데 만일 어린아이가 나도 이제 사랑에 있어 어른이니 엄마의 사랑을 받지 않고 내가 할 거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이 진정 엄마를 기쁘게 하고 사랑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사실 사랑은 잘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입니다.

특히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싫어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다른 사랑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사랑입니다.

사랑의 우리가 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잘 받는 것이 우선이 되고,

그래서 사랑의 우선순위가 바뀌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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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제목5

 

신부님 소제목1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된 땅을 찾아가는 중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앞에서 절하며 ‘이스라엘아,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 하였다(탈출 32,8). 하느님을 만나러 호렙산에 올라간 영도자 모세가 한 달이 넘도록 내려오지 않자 그들은 조급하고 불안해졌다. 그들은 홍해가 갈라지고 마른 땅을 밟고 홍해를 건넜고 이집트 군대가 몰살하는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겠지만, 남 얘기도 옛날얘기도 아니다. 지금 내 얘기고 사람들 얘기다.

눈물로 뜨겁게 한 결심이 사흘을 넘기기 힘들다. 그 결심이 위선과 거짓이거나 사람이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은 정말 약하다. 눈에 보이지 않거나 느껴지지 않으면 금방 불안해지기 시작하고 마음은 조급해진다. 그 불안과 조급한 마음이 과거의 체험과 기억을 잊어버리게 하는 것 같다.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을 이해하고도 남는다. 사나흘이 아니고 한 달 넘게 그것도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광야에서 무방비 상태로 기다리기만 하려니 얼마나 불안했겠나. 하느님을 믿는다는 건 정말 큰 도전이다. 차라리 윤리 교과서나 위인이나 현자들의 가르침을 외워서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현행 법 규정을 잘 지켜 안심하며 사는 게 훨씬 수월할 거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으니 안심하고 따라도 되고 반대나 비난받을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하느님을 믿고 산다는 건 착하게 사는 거 그 이상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길이다. 때로는 목숨을 걸고 믿어야 한다.

이종훈 신부님

 

  하느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모세에게 고발하셨다. 알고 보니 그들이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해서 당신의 진노로 그들을 쓸어버리시겠다고 했다. 그런데 모세가 하느님을 말렸다. 그렇게 하시는 게 마땅하지만 그러면 당신의 이름이 어떻게 되겠냐며 하느님을 설득했다. 그렇게 어렵게 그들을 노예 생활에서 빼내 와서는 결국은 광야에서 죽이시겠다는 거냐고 했다. 그러자 하느님이 재앙을 거두셨다. 실제로 하느님이 그렇게 마음을 바꾸셨다는 게 아니라 모세가 그렇게 훌륭한 영도자이고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중재자라고 알려주는 걸 거다. 모세 덕분에 목이 뻣뻣한 백성이 벌을 받아 죽지 않고 살게 됐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덕분에 죄를 용서받을 뿐 아니라 하느님과 영원히 살게 됐다.

사람은 참 약하다. 그러면서도 고집은 정말 세다. 근거 없이 자신이 옳고 자신은 괜찮다고 여긴다. 하지만 지나온 삶을 남김없이 다 펼쳐 놓고 최고의 선(善)이신 하느님과 셈을 한다면 그 법정이 열리기 전에 차라리 죽어 없어지는 게 좋을 거다. 하느님이 봐주지 않고 잊어버리지 않으셨다면 나에게는 희망이 없다. 나의 믿음과 결심은 아침 이슬 같다. 해가 뜨면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하느님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많은 기적 같은 일들을 잊어버린다. 그런 일들이 더 이상 우연이거나 행운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고백해 놓고도 그런다. 가슴을 치고 눈물을 쏟고도 또 그런다. 목이 뻣뻣한 백성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바로 나다. 그만큼 했으면 이제 마음을 돌릴 때도 됐을 것 같은데. 예수님이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성찬례 안에서 이런 나를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시니 지극히 죄송하고 또 한없이 감사한다. 그분을 믿는 것 말고는 내게 구원의 희망이 없다.

예수님, 주님과 더욱 친하게 지내기를 바랍니다. 그날, 제 법정이 열리는 날 바로 주님이 제 재판장이시기 때문입니다. 법대로 다루시지 않고 제 이 딱한 처지를 아시고, 주님 계명을 지키려고 애썼음을 알아주시리라 믿습니다. 한 번만이 아니라 끝까지 봐주십시오. 저는 그저 주님만 믿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신부님, 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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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님

 

   미사 후 신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제게 다가와서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제가 2004년에 신부님을 갑곶성지에서 처음 뵀었는데요.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 같으세요.”

이 말씀은 좋은 의도가 담긴 것일까요? 아니면 나쁜 의도가 담긴 것일까요? 당연히 좋은 의도가 담긴 말씀으로 감사할 내용입니다. 그러나 20년이나 지났는데, 제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20년이 지나면 외모가 바뀌는 것은 당연합니다. 바뀌지 않았다면 어디 아프거나 문제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생각이 바뀌지 않고 행동도 똑같다면 이 역시 커다란 문제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야지만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나’지금의 ‘나’가 똑같아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분의 말씀은 저 듣기 좋으라고 하신 것이겠지만, 스스로 생각해 봅니다.

    혹시 아무런 변화 없이 또 변화하려는 노력도 없이 예전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더 나은 ‘나’가 되도록 변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결같은 모습보다는 좋은 모습으로 계속해서 변하는 우리가 될 때, 이것이 주님의 뜻에 더 다가서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모진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들은 늘 한결같았습니다.

그런데 좋은 쪽으로 한결같은 것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한결같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율법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면서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들의 기준에 따라 큰 죄인이 되고 말았지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셨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인데, 이 사랑은 없어지고 오히려 활자만이 남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한결같이 하느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단 한 명도 제외 없는 구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빠집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는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다시금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피하지 않으셨던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더욱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게 되고, 비로소 주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 뜻에 더 다가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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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제목6
이수철 신부님
신부님 소제목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105,3-4)

 

올해 3월의 성 요셉성월이, 사순시기가 참 고맙습니다. 4월10일, 나라의 명운이 달린 총선을 앞두고 신자들뿐 아니라 온 국민이 정말 깨어 기도해야할 때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회개가 답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살아있을 때 기도와 회개, 사랑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어느때 보다 항구히, 간절히 깨어 기도해야, 회개해야, 사랑해야 할 때입니다. 이래야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나라도 삽니다.

  그래서 언제나 기상하면 저는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가톨릭 기도서> 1.성호경, 2.주님의 기도, 3.성모송, 4.영광송 순서대로 기도를 바친후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나로 살기위해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간절한 사랑을 담아 양팔을 활짝 펴들고 만세육창의 간절한 기도를 바칩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어제 “하”씨 성(性)의 이름을 지닌 분과 나눈 기발한 덕담에 행복했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도 하닮(하느님 닮기)의 여정을 살 수 있길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하느님과 같은 ‘하’씨 성이라 하닮의 여정을 충실히 살아내고 계시지요! 축하드립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예나 이제나 한결같은 물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입니다. 오늘의 강론 제목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영적 승리의 삶을 사세요!”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불림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유대인 랍비 여호수아 헷쉘의 말처럼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은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불림 받은 유일무이한 성소자들입니다.

불림 받은 자로서 과연 몇%,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나'를 실현하며 살고 있는지요?

 세나 예수님은 제가 볼 때 100% 참'나'를 실현한 성소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모세의 사면초가, 진퇴양난의 모습이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양상은 다소 달라도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 모세는 역시 하느님과 당신 백성의 새로운 중재자이자 우리의 영원한 중재자이신 예수님의 예표가 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이때 두분께 적대적인 사람들은 그대로 오늘날도 반복되는 인간들 모습입니다.

 

  정말 계속되는 전쟁에, 악순환의 반복에, 문명의 야만시대(?)에 과연 무지한 인간의 진보는 가능한지 묻게 됩니다. 인간성의 진보가, 영성이 바탕되지 않은 인공지능의 결과는 어떠할지 낙관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다산 어른과 논어의 공자의 말씀이 감로수처럼 삶의 지표가 됩니다.

 

“사람을 만나는 가장 어른스러운 태도는, 사람에 대해 미리 실망하지 않는 것이다.” (-다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희망이기에 사람에 절망하거나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믿는 이들이라면 결코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의 사람이 되어선 안될 것입니다.

“남이 나를 속일까, 남이 나를 믿지 않을까 미리 염려하지 마라. 다만 먼저 깨달아 아는 사람이 현명하다.”(-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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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에 대한 답은 깨달음의 은총뿐입니다. 깨달음은 빛입니다.

‘깨달음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서서히 무지의 어둠으로부터 해방입니다.

   만일 제1독서 탈출기에서 중재자 주인공 모세가 빠져 버린다면, 역시 요한복음에서 중재자 예수님이 빠져 버린다면 상황은 캄캄한 어둠일 것입니다. 두분의 찬연한 빛이 무지와 허무의 심연의 어둠을 환히 밝히고 있는 현실입니다.

정말 탈출기의 모세는 참사람의 원형이요 섬김의 모범입니다.

참으로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 섬김의 리더십을 100% 발휘하는 모세의 삶이 감동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의 심판과 무지한 백성들 사이에서 샌드위치 같은 처지로 참으로 진퇴양난의 위기입니다.

 

 답은 위의 하늘 향한 기도뿐입니다.

사생결단의 각오로 배은망덕의 무지한 못난 백성들을 살려내기 위한 모세의 단호하고 결연한 자세와 기도가 결국 하느님을 설득하여 심판을 멈추도록 합니다. 참으로 목숨을 걸고 하느님과 담판하는, 애원의 기도를 바치는 모세입니다. 백성들의 배은망덕에 진노한 하느님을 만류하는 모세의 애원이 구구절절 감동입니다.

    이처럼 하느님 마음에 정통했고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신뢰했기에, ‘하느님 답지 못하다’며 하느님의 약점을 들먹이는 이런 목숨을 건 애원의 기도가 가능했음을 봅니다. 하느님의 둘도 없는 파트너 모세처럼 기도하는 부모가, 지도자가, 어른이 교회뿐 아니라 각계 각층에 참으로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시대입니다. 하느님을 감동시킨 마지막 애원이 절정입니다.

“당신 자신을 걸고, ‘너희 후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땅을 모두 너희 후손들에게 주어, 상속 재산으로 길이 차지하겠다.’

하며 맹세하신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

 정확한 사실(facts)에 근거한 모세의 설득에 감동한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던 재앙을 거두니 하느님과 영적전쟁에 승리한 ‘기도의 사람’ 모세입니다.새삼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잘 알기 위해서는, 영적 승리를 위해서는 모세처럼 성서의 말씀에 정통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다음은 요한복음에서는 유다인들에게 사면초가의 위급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위한 증언을 명명백백하게 밝힘으로 이들과의 영적전쟁에 승리합니다.

1.세례자 요한이,

2.아버지께서 완수하라 맡기신 일들이,

3.아버지께서.

4.성경이 예수님 당신을 증언함을 밝히시며 이들의 부족이 무엇인지 알려주시며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과연 무엇이, 누구가 오늘의 우리를 위해 증언해 줄 것인가 묵상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삶이 우리를 증언해 줄 것이며 이웃도 우리를 증언해 줄것입니다. 만세육창을 바치는 저로 말하면 하느님이, 예수님이, 나라가, 교회가, 성모님이, 수도원 공동체 형제들이, 또 매일 삶을 담아낸 강론들이 저를 증언해주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다음 유다인들을 향한 예수님 말씀이 흡사 우리를 향한 충고 같습니다.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지 않는다. 나는 너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온 모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이들의 성서말씀 공부 부족과 믿음 부족을 맹렬히 꾸짖는 예수님입니다. 기도의 싸움에서 하느님을 이겨낸 영적 승리의 모세처럼, 유다인들을 궁지에 몰아넣음으로 예수님의 영적 승리로 대미를 장식하는 오늘 복음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한결같고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공부로, 하느님의 지혜와 힘으로 무장했을 때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사순시기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적 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구원을 가지시고, 저를 찾아 주소서.”(시편106.4).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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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제목7

 

이진훈 신부님 사진

평화를 빕니다. 저를 포함해서 신부들은 대체로 외모에 별로 관심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신부님 중에 옷을 잘 입으시는 분이 있었는데

이분은 다른 신부님과 달리 항상 깔끔한 옷차림의 위아래가 잘 어울리는 그런 옷들을 맞춰 입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분들이 '비싼 명품' 옷을 입고 다닌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위에서 옷이 무척 비쌀 것이라는 생각에 입고 있는 옷에 대해서 한 번씩 물어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은 그냥 시장에서 파는 동대문시장 같은 시장에서 파는 저렴한 옷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영화 배우 누가 입으면 싸구려 옷도 명품처럼 보이는 것처럼 바로 그 신부님이 이런 분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신부님이 비싼 명품 옷을 입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싼 옷이 아니라고 누누히 말을 해도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자신의 관점에 매여 있는 부분들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것을 믿는' 그런 부분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유다인들 또한 예수님에 대한 생각과 그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당신에 대해 변론하시고 계시는데 당신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증언할 때 그 증언이 유효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시고서 당신을 확증할 수 있는 몇 가지 증언들을 제시하십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의 증언입니다. 요한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 장차 오실 분에 대해서 증언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입니다. 이 일들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것이며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어 행하셨다는 것을 주님께서 밝히고 계십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 아버지의 증언이며 마지막으로 성경의 증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지만 사실 성경은 예수님 당신을 증언한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당신에 관한 다양한 증언을 여러번 알려주시지만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생명의 원천이시고, 아버지에게서 파견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불신과 배척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마음, 또 생각은 어떠한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을 구하고 있는지, 아니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유다인들처럼 자기들끼리 나눈 영광에만 몰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자로 고백하며 우리 안에 하느님을 향한 마음과 그 믿음이 자라고 커질 수 있도록 이 사순 시기에 은혜로운 회개의 여정을 이어가시면 좋겠습니다.아멘. (이진훈 코페르티노의 요셉 신부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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