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3월 15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오늘의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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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15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오늘의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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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5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금요일 미사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15일 매일미사

 

 

 

2024년 3월 15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오늘의 복음 묵상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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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5일 금요일 제1독서

2024년 3월 15일 금요일 복음

매일미사책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묵상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이민우 유스티노 신부님,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보러 가기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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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5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2,1ㄱ. 12-22

악인들은

1 옳지 못한 생각으로 저희끼리 이렇게 말한다.

12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13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이라고 부른다.

14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15 정녕 그의 삶은 다른 이들과 다르고 그의 길은 유별나기만 하다.

16 그는 우리를 상스러운 자로 여기고 우리의 길을 부정한 것인 양 피한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17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18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21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22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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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5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금요일 복음 말씀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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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5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적대와 증오와 분노는 모두 그분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는 확신에서 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죽이려는 자들 때문에 유다 지역으로 가시지 못하고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시는 정황을 드러내며 시작됩니다. 그러나 초막절이 되자 그분께서는 더 이상 갈릴래아에 머물지 않으시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시어 "드러내 놓고" 가르치십니다.

  본문은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다."라는 표현으로 예수님께서 단순히 두려움 때문에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신"것이 아님을 밝혀 줍니다. 이렇게 과감하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자 유다인들은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라며 불안해합니다. 이유는, 유다인들의 통념에 따르면 메시아는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데",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이신 것이 알려져 있으니 분명 메시아이실 리가 없고, 그럼에도 산헤드린의 의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까 보아 안절부절못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라고 인정하시면서 여기에 중요한 사실 하나를 덧붙이십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다."

 

곧 당신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신 것은 맞지만, 무엇보다 ‘하느님에게서 오셨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권력과 권한이 막강할수록 자신에게 불편함을 주는 존재를 처리하는 방식은 단순합니다. 제거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독서의 지혜서 본문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어떠한 최후를 맞게 되실지를 요약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에게 가해진 폭력을 ‘눈먼 비극’으로 선언합니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여기는 확신이야말로 눈먼 판단이며, 위험한 폭력일 수 있습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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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일 오늘은 나의 대선배이자 내 공동체의 수호성인인 클레멘스 마리아 홉바우어 성인 축일이다(1751-1820).

성인은 이태리 나폴리에서 창립된 수도회 구속주회를 알프스를 넘어 유럽에 퍼지게 했고 지금 내가 이 수도회 안에서 살게 했다. 그래서 제2의 창립자라고도 불린다. 성인은 지금의 체코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제빵사로서 일하면서 가사를 도왔다. 그때 어머니가 어린 클레멘스에게 십자고상을 가리키며 ‘이제는 이분이 너의 아버지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성인은 사제가 되기를 열망했다. 그런 열망으로 로마 순례를 갔고, 거기서 주교의 허락을 받아 은수자 생활도 했다. 성인은 그때 기도하는 법, 하느님과 함께 있는 고독을 배웠을 거다.

 

  창립자 알폰소 성인을 ‘기도하는 사람’ , ‘기도의 사람’이라고 부른다면 클레멘스 성인은 ‘믿은 사람’, ‘믿음의 사람’이라고 부른다. 믿음은 캄캄한 거다. 미지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성인은 로마 순례를 여러 번 다녀왔는데, 그 당시 순례는 지금의 성지순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목숨을 걸어야 했다. 지금은 비행기와 버스를 타고 가지만 그때는 걸어서 갔고, 지금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그때는 물어물어 찾아가고 가는 길에 험한 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이 길이 순례지로 이어진다고 믿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성인의 믿음과 용기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 같다. 성인은 믿음으로 로마로 왔고 거기서 구속주회를 만나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로마를 떠나 알프스를 넘어 유럽 이곳저곳에 구속주회 공동체를 세우고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성인은 사목지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다. 보육원을 세우고 저녁기도회를 만들었다. 온갖 악기를 동원해서 전례를 풍요롭게 만들어 교우들이 기도할 수 있게 했다. 자기 집을 개방해서 청년들과 학자들을 초대해 대화하고 토론했다.

  성인의 사도직들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정부의 정책에 따라 공동체가 폐쇄되고 그곳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하지만 성인은 다른 나라로 가서 그 지역에 필요한 일을 찾았다. 성인은 쉬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요즘 말로 맨땅에 헤딩하듯이 새 일을 찾고 실행하는 것, 그것이 성인의 믿음이었다.

 

  성인에 관한 유명한 그림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성인이 감실 앞에 무릎을 꿇고 감실문을 두드리는 그림이다.

보육원의 아이들 음식이 떨어지자 감실문을 두드리며

‘아버지,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습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하실 차례입니다.’ 라고 기도했다. 그다음 날 어떤 사람이 빵과 음식을 한 바구니 들고 나타났다고 한다.

  어머니가 가르쳐준 그대로였다. 아버지의 섭리에 맡길 줄 알았다. 또 다른 그림은 식당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다른 아저씨들 식탁 앞에서 성인이 한 손으로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다른 손으로는 모자를 들고 돈을 청하는 모습이다. 보육원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그들에게 도와달라고 청하자 그들이 성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러자 성인은

 ‘이것은 제게 주시는 것이고 이제 아이들 것을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 행동과 말에 두려움을 느끼며 돈을 주었다. 그런데 성인의 가장 큰 약점은 욱하는 성격, 인내 부족이었다. 성인은 아이들, 가장 작은 이들에게 잘해주려고, 주님을 섬기는 종으로서 자신의 가장 큰 약점까지 견디어 낼 수 있었다.

성인은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섭리하시는 아버지를 믿은 사람이었다. 은수자 생활을 할 때 배운 하느님과 내적인 일치를 간직하며 살았을 거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겼다.

예수님, 성공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고 저희를 부르셨습니다. 가장 작은 이들 안에 계시겠다고 하셨으니 주님을 섬기듯이 그들에게 잘해줍니다. 친구이자 주님의 종인 클레멘스에게 해주셨던 것처럼 제게도 굳고 깊고 순수한 믿음을 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가 제 어머니입니다.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구속주회 한국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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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시기가 점차 끝을 향해 가기에 독서와 복음은 주님께서 왜 죽임을 당하게 되는지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오늘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리(악인들이)가 죽이려고 들 때 그가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살리실 거라는 논리로 하느님의 아들을 죽인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런 비슷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요.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호하고 구해주실 거라는 믿음 말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짓을 할 때 그런 짓을 하도록 보호하거나 구해주지 않으실 것이니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호하고 구해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지요.

문제는 그 악이 어떤 악인가 그것입니다. 그 악이 우리가 싫어하는 그런 악인가,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그런 악인가?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싫어하는 그런 악들,

예를 들어, 병이나 실패 같은 것들로 우리를 오히려 시험하시고 단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선 그런 악에서 언제나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으시고,

어떤 때는 오히려 그런 것들을 주시어 우리를 진짜 악에서 보호하십니다.

 

'진짜 악.'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짜 보호받아야 할 것은 진짜 악들로부터입니다.

진짜 악은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인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께 가지 못하게 하고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 세상에서의 시련은 우리를 세상에서 떠나 오히려 아버지 하느님께 우리가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사람들이 악한 의도로 주는 시련과 악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시련과 악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가지 않고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서.

 

그런데 오늘 지혜서를 묵상하면서 제게 더 강렬하게 다가온 말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짐이 된다.”

“To us

he is the censure of our thoughts;

merely to see him is a hardship for us.”

 

하느님의 아들이 악인들에게는 보는 것만으로도

짐이 된다고 하는데

내게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람들은 힘이 되는가? 짐이 되는가?

이 점을 묵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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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빕니다. 예전에 예전에 '콘스탄틴'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게 2005년의 영화인데 조만간에 후속작이 나온다고 합니다. 하여튼 간에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악마를 사냥하고 나서 이렇게 악마를 사냥하고 있는 내가 어찌해서 천국에 가지 못하느냐 천사에게 묻자 천사가 "너는 하느님을 알고만 있을 뿐이다. 그것으로서는 천국에 갈 수 없다." 라고 그렇게 대답을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루살렘 주민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루살렘 주민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냥 알고만 있었을 뿐입니다.

 

제가 영상대학원을 다닐 때에 인간 연구라는 그러한 과목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담당 교수님이 후타요시에라는 일본 사람이 쓴 고야 전기를 읽어보라고 그리고 요약을 하라고 요약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게 네 권짜리의 아주 엄청나게 긴 인물전이었습니다. 고야는 여러분들 다 아시다시피 스페인의 유명한 화가죠. 

 

 거금을 주고 내용은 모두 사서 읽어보았는데 근데 좀 엉망이었습니다.

후타 요시에는 20세기 일본 사람인데, 20세기의 사람이 18세기의 사람 고야를 20세기의 정신과 사상과 판단 기준을 가지고 그렇게 썼던 겁니다. 고야가 살던 그 당시에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가 삶의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특별히 스페인은 더욱더 그러했는데 그것을 딱 떼어놓고 고야를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저자는 고야의 작품들을 설명할 때에 현대 인문학적인 시점과 관점 그리고 일본인 특유의 감성 등으로 해석을 해놓았지만 정작 고야의 사상과 예술성의 근원인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고야는 그리스도교를 경멸했고, 종교를 떠나 자유로운 인간이었다라고 이런 식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고야가 비록 교회를 비판했지만, 그것은 교회가 좀 더 하느님 뜻대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즉 애정 때문에 비판하고 쓴 소리를 한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맥락은 전혀 띄워놓고 고야가 그냥 부패한 교회를 비판했다라고 하면 고야를 전혀 모르고 그리스도교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 고야에 대해서 안다고 착각하고서 그렇게 전기를 쓴 거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알고 하느님을 안다 알고 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까지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 기도하고 연구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알게 된 하느님은 그냥 아는 하느님이죠. 후타요시의 정도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하느님을 알려면 그냥 지식적인 아는 수준에서 끝나면 안 되는 겁니다.

하느님을 '체험'해야 하고, 실천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삶이 '복음화'가 되어야 됩니다. 즉, 그리스도화되어야 합니다.

영화 콘스탄틴에서 주인공은 처음에는 천국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천국에 갈 수 있는 상황이 됩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냐면 자기 목숨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구하였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이웃을 위한 사랑으로 자신을 희생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했기 때문에 진정으로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근데 진정으로 안다고 하려면 예루살렘 주민이나 후타요시처럼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사실이나 지식적인 차원에서 안다고 할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하고 실천하는 신앙에서 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합니까?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민우 유스티노 신부님,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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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신학교에 입학해서 사제 성소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사제로 만 25년을 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성소는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이미 신부가 되었지만, 완성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자기 성소가 아니라며 사제의 길에서 벗어나는 경우를 관심 있게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 성소가 아니라는 본인의 말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완성된 성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완성되지 않았으니 자기 성소가 아직 아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완성되기 전에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성소’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은 늘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는 길이었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길로만 가려고 할 때, 진정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낄 수가 없으며 그 길로 제대로 갈 수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주님의 진정한 협조자도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을 드러내고 당신을 세상에 높여 세우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자기만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는 성소의 초기 단계에 머무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는 완성된 것이 아니어서 그 안에서 결코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또 큰 혼란 속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 성소가 아니라면서 걷어차고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주님 안에서만 자기 성소가 완성되어 갑니다.

기도하며 또 사랑을 실천하면서 나의 성소를 성숙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성소를 확실하게 지켜 나가셨습니다. 즉, 자기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삶을 철저하게 사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사람은 두려워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최고 의회 의원들의 모습이 대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시지만, 최고 의회 의원들은 못마땅해하면서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분을 잡으려고 하지만 손도 대지 못합니다. 성경은 아직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이 두려웠고 자기들이 하려는 일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삶을 살다 보니 다른 사람의 시선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봐야 할 시선은 하느님의 시선이었습니다. 그 시선에 집중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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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은 마음의 진실을 반기시니, 가슴 깊이 슬기를 가르치시나이다.”(시편51,8)

 

하루하루가 참 좋은 선물입니다.

기도하라, 회개하라, 사랑하라 주어지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3월 성요셉성월에 3월31일 부활대축일을 앞둔 지금의 사순시기는 참으로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참으로 하루하루 선물에 감사하며 힘껏 살아야 할 참 소중한 때입니다.

성지가 있어 성인이 아니라 성인이 있어 성지입니다. 성인은 수도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곳곳에 있고 성인이 있는 곳 어디나 성지입니다. 하느님이 계신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그러니 어디에나 하느님이 계신 성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을 만나야 할 꽃자리 성지입니다.

 

어제 어느 형제님의 묵상글을 보면서 감동했고 다시 배웠습니다. 일부 인용합니다.

 

“요즘 아버지께서 성서 40주간에 참여하십니다.

연세가 89세이신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침 5시에 일어나셔서

묵주기도와 작은 성무일도를 바치시고,

평화방송에서 하는 미사에 참례를 하십니다.

그리고 저녁에도 성무일도를 바치시는 아버지입니다.”

 

말그대로 주님의 영원한 현역의 형제입니다. 이런 분들이 평범한 일상의 성인입니다.

믿음생활에는 제대가 없고 졸업이 없습니다.

죽어야 제대이고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현역의 전사이자 학생입니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 주님의 평생 전사이자 죽을때까지 공부해야하는 주님의 평생 학인입니다. 89세 고령에도 성서공부에 열중하시니 참 놀라운 주님의 평생학인입니다. 이렇게 보고 배울 노령의 아버지를 둔 형제님은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슨 싸움입니까? 무지와의 싸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참 '나'로 살기위한 영적전쟁입니다.

무슨 공부입니까? 참 '나'를 알기위한 공부입니다.

참 '나' 를 알기위한 평생전투요 참나를 알기위한 평생공부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주님은 답이라 했습니다. 주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 탐구와 참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주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이자 이런 이들이 의인이요 현인입니다. 주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이 악인이요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제 신원을 새로이 확인할 때 마다 읽어보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좌우명 고백 기도중 한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교회에 몸담고 살아가는 모든 신자들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서의 삼중신원입니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되겠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형제들과의 날로 깊어지는 전우애(戰友愛)와 학우애(學友愛), 그리고 형제애(兄弟愛)가 내적 힘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무지로부터의 해방도, 참 자기인식도 참나의 삼중 신원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면서 가능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의인과 악인의 대조가 뚜렷합니다.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이들이 의인이요, 주님도 참나도 모르는 무지한 이들이 악인입니다. 의인을 시험하는 무지한 악인들의 모습을 지혜서는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무지의 악에 눈먼 이들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입니다. 무지에 대한 처방은 단 하나 주님을 사랑하여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 끊임없이, 한결같이 하느님을 알고 참나를 알아가는 삶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서서히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오늘 복음도 무지의 악인들에 포위되어 있는 의인 예수님의 모습이 그대로 오늘 지혜서의 반복같습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영원히 지속될 무지의 악과의 전쟁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기를 모르는 무지한 유다인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자기가 누구인지 압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참나의 신원을 확인하는 의인이자 현인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알아야 참나의 신원을 알게 되고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이 또한 우리의 평생과정입니다.

   무지의 치유, 무지로부터의 해방에 날마다의 미사전례보다 평생교육에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서 “더불어, 예닮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네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 드려라, 당신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이 흔들리게 버려둘리 없으리라.”(시편55,23). 아멘.(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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