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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6일 매일미사 복음ㆍ독서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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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6일 매일미사 복음ㆍ독서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오늘의 말씀 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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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6일 매일미사 복음ㆍ독서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오늘의 말씀 묵상

2024년 3월 6일 매일미사 복음ㆍ독서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오늘의 말씀 묵상

 

 

2024년 3월 6일 수요일 매일미사 오늘의 복음 묵상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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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6일 수요일 제1독서

2024년 3월 6일 수요일 복음

가톨릭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보러 가기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이다한 스테파노 신부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미사中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보러 가기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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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6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제1독서

 

너희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4,1.5-9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곳을 차지할 것이다.

5 보아라, 너희가 들어가 차지하게 될 땅에서 그대로 실천하도록, 나는 주 나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명령하신 대로 규정과 법규들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었다.

6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 모든 규정을 듣고,

‘이 위대한 민족은 정말 지혜롭고 슬기로운 백성이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

7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8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9 너희는 오로지 조심하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 너희가 두 눈으로 본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그것들이 평생 너희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

또한 자자손손에게 그것들을 알려 주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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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2024년 3월 6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수요일 복음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1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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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2024년 3월 6일 매일미사 제3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그 어느 때보다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나 기존 전통을 종식시키시고, 그와 상반된 도전과 파격을 주시려고 오신 분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율법은 인간의 삶에서 ‘실천’하도록 제정한 지침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직된 전통주의와 주입식 강요는 이를 실천하고 생활화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획일화된 이론은 공감으로 이어지지 못하였고, 공감하지 못하니 실천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지도층의 도식화된 교육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율법 학자들은 그 허술함을 감추려고 더욱 가혹하게 율법과 규정의 잣대를 들이대었고, 그 결과 가식과 위선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와 다른 방식을 택하십니다. 공생활을 통하여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가까이 계시면서’ 참된 진리를 몸소 보여 주셨고, 목숨까지 바치심으로써 사랑의 진정성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분은 정녕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참된 쇄신과 개혁은 이전의 것을 폐기하고, 과거와 단절하며 완전히 새로운 파격을 만들어 내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전통과 역사 안에 한결같이 존재하여 온 진리가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지를 공감하게 하여 구체적으로 살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혁명이고 참된 진보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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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해진 수련기를 지내고 공적으로 서원을 해야 수사 또는 수녀라고 불린다. 수련기에는 도전도 유혹도 참 많다. 그래서 가장 순수한 때라고 하고 수련기 때 죽으면 바로 천당에 들어간다고 한다. 수련장 소임을 하던 때 서원식 바로 전날 수련자 형제와 지난 시간을 뒤돌아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에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형제는 수련을 수료한 게 아니라 수도 생활을 배우고 익힌 것이니, 내일부터 지금 이대로, 아니 이보다 더 충실하게 살아가세요." 성령님이 그 자리에서 그와 나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곳을 차지할 것이다. … 보아라, 너희가 들어가 차지하게 될 땅에서 그대로 실천하도록, 나는 주 나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명령하신 대로 규정과 법규들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었다(신명 4,1.5).”

 

 이는 이스라엘이 이집트 노예 생활을 탈출해서 광야에서 40년을 헤맨 후,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기 전에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전한 하느님 말씀이다. 하느님이 주신 규정과 법규는 약속된 땅, 지금 우리에게는 하늘나라,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동시에 그곳에서 지켜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이는 강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지키게 되는 법이다. 하느님 나라에서 사는 길이 그 법을 지키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그것을 배우고 익혔다.

 

 지상교회의 삶이 이스라엘이 광야를 헤맨 그 40년과 같은 일종의 수련기가 아닐까?

지도상으로 보면 며칠이면 갈 거리를 이스라엘은 40년을 헤매고 돌아다녔다. 그 기간에 이스라엘은 조급한 마음에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모세와 하느님께 대들어 야단도 맞고 일부는 죽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오는 기적을 경험했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와 어디선가 날아오는 메추라기를 먹기도 했다. 그들은 그렇게 처음 만난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백성으로 사는 길을 배워 익혔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지상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길을 배워 익히는 중이다. 하느님 말씀, 예수님의 모범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고 알고 따른다. 잘 안 되는 것도 자꾸 하면 된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언제나 끝까지 용서하시고 마지막 순간까지 기회는 열려 있으니 조급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충실히 수련한다.

 

 예수님은 수백 개의 율법을 두 가지 계명으로 요약 줄여주셨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다.

이 계명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거다. 그런데 우리가 매일 맞는 실제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다양해진다. 이런 환경 속에서 사람답게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길이 바로 윤리다.

  그런데 때로는 교회와 세상의 두 윤리가 서로 충돌한다. 어느 ‘열심한?’ 교우가 나라에서 존엄사를 법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존엄사란 말은 품위 있게 포장한 안락사이다. 환자와 그 가족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모르지 않는다. 이른바 시험관 아기 시술은 살인이다. 그 시술 과정에서 많은 수정체가 버려지기 때문이다. 교회는 난자와 정자가 만나 수정되는 그 순간부터 사람이라고 가르친다. 난임 부부들의 고통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교회는 이 법을 지키라고 가르친다. 존엄사를 말하지 말고 선종 기도를 바치고 구체적으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죽음의 과정을 잘 지켜주는 호스피스 프로그램과 그 병동을 늘리고, 임신이 안 되면 입양이나 또 다른 형태의 부모 역할을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떨까? 신앙과 인간의 삶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오류가 없다고 믿는다. 그 가르침에 도전할 만큼 똑똑하지 않지만, 그보다는 우리 하느님은 참 좋은 아버지라고 믿기 때문이다.

예수님, 주님 말씀하신 것 모두가 진리입니다. 주님의 성령에 따라 교회가 가르치는 윤리적 가르침을 믿고 따릅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그렇게 실천하지 않아도 저는 그 가르침을 따릅니다. 저에게 이득이 돼서 아니라 그게 하늘나라 시민이 이 세상에서 사는 길이고 세상은 보지 않고 볼 수 없는 고통의 신비를 믿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갖가지 시련을 겪는 이들을 위로하시고 바른길로 인도하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신부님, 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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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에 613가지나 되는 '율법 조문'에 의해서 '제약 아닌 제약'을 받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라는 분은 언뜻 보기에 그런 조문에 별로 개의치 않아하고 어쩌면 그런 것들을 무효화하는 분이 아닐까 하는 기대아는 기대를 받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율법의 폐지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현실적으로 또 어떤 삶이나 조직을 질서 있게 만들고 정돈하기 위해서 법 규정이라는 것은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전례에도 여러 관련 규범들이 있고 우리 가톨릭 교회의 활동 전반을 규정하는 교회법이 있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진정 관심 있으셨던 바는 법이 있어야 하냐, 없어야 하냐 같은 단편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 법이 '어떻게 지켜지는지', 그 법이 '정말 올바른 참 뜻과 그 본질로 채워져 있는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오늘 복음에서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완성하러 왔다고 하신 말씀에서 "완성하다"라는 말에 성경 그리스어 원문(고대 그리스어 희랍어 'πληρόω' : 완성하다, 가득채우다)은 '채우다'라는 것을 뜻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당시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지킨다고 자부하는 그 율법 규정은 그 참뜻과 본질을 잃어버린 속빈 강정과 다름없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복음의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전에 바치는 예물은 중시하면서 부모에 대한 의무는 등한시하는 모습, 그렇게 본질을 잃어버린 규정 준수를 예수님께서는 피하고자 하셨습니다. 그 대신에 당신의 여러 가르침과 행적을 통해서 율법의 글자를 넘어서는 사랑과 자비, 용서와 같은 참뜻 그 본질을 강조하시며, 그러한 본질을 바로 우리의 율법, 바로 그들의 규정 준수에 채우고자 하셨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본질은 너무 당연한 인간의 도리이고 어떤 화려하게 외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보니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일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일상에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것, 별로 특별하지 않게 여겨지는 그러한 것까지 지키는 이가 큰 사람이라고 가르치셨으며, 더 나아가 당신의 삶을 통해 그러한 율법 규정의 참뜻과 본질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채우고자 하셨습니다.

어쩌면 복음의 다른 곳에서 숨은 일도 보시는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라고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희망과 위로, 또 끊임없이 동기를 부여해 주는 말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작고 사소하며 그다지 특별한 업적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을 하느님께서는 기억해 주시고, 또 복음의 가치를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나의 모습과 노력 역시도 기억해 주신다는 믿음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나에게 대단치 않게 느껴지는 일상일지라도 그것을 하느님께서는 대단하게 보시며, 또한 그런 일상이 하느님께서 기억하시는 우리를 위한 은총의 시간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 사순 시기가 우리에게 그러한 은총을 더욱 깊이 깨닫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우리의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우리의 믿음의 본질, 우리 신앙생활의 본질을 묵상하면서 늘 하느님의 시선에 우리의 마음을 돌 수 있도록 또한 주님의 이끄심을 청하면서 이 사순 시기를 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이다한 스테파노 신부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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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오늘 모세는 자기 백성에게 하느님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분이라고, 그러니 이런 하느님을 모신 이스라엘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라고 추켜세웁니다. 그렇다면 저는 또 우리 배달민족은 이스라엘처럼 위대한 민족입니까?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선 저와 우리 민족에게도 가까이 계셔 주십니까? 물론이고 당연합니다.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느 민족에게나 가까이 계셔 주십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누가 느낍니까?

모두 느끼고 모든 민족이 느끼는 것 아닙니다.

 

소 닭 보듯 하는 사람 많습니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무덤덤합니다.

그런데 소와 닭은 왜 관계가 그렇습니까?

소가 닭을 잡아먹는 동물이라면 그럴 리 없습니다. 소는 잡아먹으려고 닭을 노려보고 닭은 소가 덮칠까 경계하며 볼 것입니다. 서로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입니다. 그렇다고 둘은 친하지도 않습니다.

관심사가 다를 뿐 아니라 호감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끌림이 서로 간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소 닭 보듯 관계가 바로 ‘실천적 무신론’의 관계입니다.

실천적 무신론은 존재적 무신론이 아닙니다. 존재적 무신론은 신이란 존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천적 무신론은 신의 존재 여부에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곧 상관없고 관심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계시지만 내 삶 안에는 없습니다. 계시긴 하지만 저기 부산에 계신 것입니다.

여기 내게 가까이 있어도 내 삶 안에 없고, 내가 뭘 실천할 때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내 좋을 대로 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하고 원치 않으시면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는 것으로 철저히 자기중심입니다. 요즘의 무신론은 대개 이런 무신론입니다.

  있냐 없냐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없는 것이 아니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기에 고민조차 하지 않는 무신론이고, 그래서 존재적 무신론보다 더 나쁜 무신론이 소 닭 보듯 무신론입니다.

 하느님이 아무리 가까이 계셔도 소 닭처럼 계시니 하느님의 계명도 간단히 제쳐버리겠지요?

그래서 오늘 모세가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라고 얘기해도 그저 웃기만 하고 코웃음 칠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이 아무리 가까이 계셔도 없는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 계명이 거미줄의 바람 같을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와 하느님은 소 닭처럼 가까운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오늘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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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시편 86,4)

 

저에게 공부는 단 둘 뿐입니다. 하나는 “참사람 되기 위한”공부, 하나는 “잘 죽기 위한” 공부입니다.

남은 동안의 평생공부도 둘 뿐입니다. 제가 매일 강론 쓰는 목적도 실은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자주 소개했던 기도이자 사랑의 표현이었던 만세육창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기상하여 하루가 시작되기 전 양손을 활짝 펴 들고예수님의 십자가와 태극기 앞에서 날마다 부르는

“만세육창-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입니다.

그런데 어제 반가운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만세를 부르자’라는 글이었습니다.

만세 부르기는 참 좋은 기도이자 운동으로 뇌졸중 예방에도 좋다합니다. 사실 몸과 마음을 다한 만세보다 절박한 기도도, 사랑도 없을 것입니다. 호기심에 "김점선" 이름을 검색해 봤더니, 1946년 출생, 2009년 3월 22일 별세. 홍익대 대학원 서양학과 졸업. 1년 365일, 하루 24시간 내내 그림을 그리고 싶어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했던 화가로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만 63세로 타계하기 전까지 참으로 치열하게, 가열하게 살았던 화가이자 시인이었습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답이 없습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삶은 싸움이자 전쟁입니다. 젊었을 때에는 공부와 싸우고, 중년에는 일과 싸우고 노년에는 병마와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의 싸움은 믿음의 싸움, 희망의 싸움, 사랑의 싸움, 인내의 싸움입니다. 특히 노년에 병고를 겪는 분들을 보면 고통의 삶자체가 “십자가의 길”임을 봅니다.

 

 새삼 습관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영성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 습관입니다. 노년에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습관으로 삽니다. 몸에 밴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무엇보다 일찍부터 하느님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노년의 병마와의 싸움에 승리도 이런 신망애(信望愛)의 훈련이 잘 되어 습관화되어 있을 때 가능함을 체험합니다.

    제가 근래 참 많이 강조한 “선택-훈련-습관”의 도식입니다. 이런 면에서 수도공동체가 평생 날마다 마음을 담아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보다 더 좋은 신망애(信望愛)의 훈련은 없을 것입니다. 마침 오늘의 다산 어록과 공자의 말씀도 좋았습니다.

 

“공부는 사람을 깨닫고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이다. 그 시작은 나를 알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다산 “번지가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知)에 대해 묻자 공자가 답했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논어).' 사랑과 앎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사랑할 때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이요 공부 중의 평생공부가 사랑공부입니다. 인생은 사랑의 학교요, 우리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현역의 평생학인(平生學人)입니다. 저는 이런 자세로 매일 강론을 씁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신망애(信望愛)에는 영원한 초보자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율법”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율법 사랑은 얼마나 단호하고 결연한지요! 율법이나 예언서야 말로 하느님 사랑의 총화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들의 완성은 사랑뿐임을 깨닫게 되며, 이어 예수님의 복음은 사랑의 구체적 실천을 알려주는 내용들이 소개됩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은 계명들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계명들을 사랑한 예수님이요, 율법 하나하나가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기에 그토록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의 어떠한 세부조항도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추상적이 아니라 율법의 준수를 통해 구체성을 띄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본능적으로 표현을 찾습니다. 사실 모든 율법준수나 수행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연을 사랑하고, 기도를 사랑하고, 노동을 사랑하고, 공부를 사랑하고, 정결을 사랑하고, 성독을 사랑하고, 단식을 사랑하고, 순종을 사랑하고, 가난을 사랑하고, 수도생활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수행과 더불어 마음의 순수에 내적자유요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그러다 보면 저절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1독서 신명기 모세를 통한 주님 말씀은 이런 사랑의 수행에 한결같이 충실한 우리들에게 주는 말씀처럼 아주 고무적입니다.

 

“너희는 그 사랑의 율법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사람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를 가진 위대한 민족이 어디 있느냐?”

그대로 오늘 사랑의 계명을 충실히 준행(遵行)하는 위대한 민족, 가톨릭교회 신자들인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처럼 들리니 용기백배, 사기충천해지는 느낌입니다. 주님은 하루하루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시 보고 들은 사랑을 우리 모두 마음 깊이 새기고 실천하고 전하라 명하십니다.

 

“너희는 오로지 조심하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 너희가 두 눈으로 본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그것들이 평생 너희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 또한 자자손손에게 그것들을 알려주어라.”(신명 4,9).

 

오늘날 교육의 결정적 취약점인 ‘신앙과 전통의 전수(傳受)’ 역시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시편 16,11).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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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때 처음 타자기를 보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는 보편화되지 않았지요. 따라서 타자기는 너무 신기했습니다. 더군다나 직접 타자를 쳐보면서 종이에 글이 찍히는 것을 보면서 마치 책을 출판하는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당연히 자판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 이름을 타자 치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특히 두 손가락만을 이용한 독수리 타법이라서 1분에 3~40개의 단어만 띄엄띄엄 타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뒤에 실력을 향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두 손가락의 독수리 타법으로는 실력 향상이 불가능했습니다. 저의 이 독수리 타법을 본 누군가가 양손을, 그러니까 모든 손가락으로 타자를 하면 속도가 빨라진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계속된 연습으로 양손을 모두 사용할 수 있었고, 또 타자기 자판도 모두 외우면서 속도가 비약적으로 향상했습니다. 한때, 1분에 800타까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당시에 두 손가락만 사용하는 독수리 타법만을 고집했다면 실력 향상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을 몸에 익히면서 비로소 향상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과거의 방식에만 매여있으면 어떤 발전도 이룰 수 없습니다. 새롭게 변화하는 모습을 만들어 갈 때,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와 너무 다른 이 현재를 살면서, 이 현재에 맞게 신앙생활도 계속 변화 발전시켜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그때가 좋았어.’만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과거에만 매여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만을 강조하면서 그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조항은 모두 613개에 이르지요. 사실 이 조항 613개를 거슬러 올라가면 십계명이 되고, 또 이를 다시 줄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이 사랑이 율법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매여있는 종교 지도자들은 사랑은 보지 않고 613개의 조항만을 봅니다. 사랑의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으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이 녹아들어 갔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율법과 예언서의 완성은 사랑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인 삶이 아니라, 지금 실천해야 하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 안에서만 우리는 하느님 나라로 힘차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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