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3월 3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일 복음ㆍ독서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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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3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일 복음ㆍ독서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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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3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일 복음과 독서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3일 매일미사

주님의 이름은 거룩하시니,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주님의 계명에 기울게 하여 주시기를 오늘 사순 제3주일을 맞으며 청합시다. 또한, 십자가의 지혜로 죄에서 해방되어 이기심을 버리고 성령의 선물을 받아 주님 사랑의 살아 있는 성전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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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3일 가톨릭 주일미사오늘의 복음 묵상 (클릭/바로가기)

     [  목         차 ]

매일미사 오늘의묵상 보러가기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OFM, 작은 형제회) 보러가기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보러가기

박명진 요셉 신부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2024년 3월 3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일 주일미사 제1독서

제1독서(!)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다(요한 1,17).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20,1-17

그 무렵 1 하느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2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3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4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5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7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11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

12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13 살인해서는 안 된다. 14 간음해서는 안 된다. 15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7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20,1-3.7-8.12-17

그 무렵 1 하느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2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3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7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12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13 살인해서는 안 된다. 14 간음해서는 안 된다. 15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7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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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3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일 주일미사 화답송

화답송

◎ 주님,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1.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

2.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

3. 주님을 경외함 순수하니 영원히 이어지고, 주님의 법규들 진실하니 모두 의롭네. ◎

4. 금보다 순금보다 더욱 값지며, 꿀보다 참꿀보다, 더욱 달다네. ◎

 

 

 

 

 

 

 

 

 

2024년 3월 3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일 주일미사 제2독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2-25

형제 여러분,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25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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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3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일 주일미사 복음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25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23 파스카 축제 때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

2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25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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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3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일 주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고 그분을 만나는 곳입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 그의 집으로 간다는 것은 그만큼 친밀하다는 뜻이며, 서로 긴밀히 나누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고르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집’은 무엇보다도 안전하고 조용하며 개인적인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집’인 ‘성전’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조용하고 안전하게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여야 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이를 방해하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을 보십니다. 이것들은 ‘제사’를 드리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었고, 제사는 하느님과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절대적인 자리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이르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사실 예루살렘 성전의 문제는 각종 동물과 장사꾼들로 지저분해지고 혼잡해진 외적 환경에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심각하였던 것은 구원을 사고파는 ‘내적 타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루살렘 성전에 오신 것처럼, 파스카를 준비하는 우리 자신의 성전(마음)에도 오십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을 보신다면 과연 예수님께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타락과 위선과 죄를 보시겠지만 그다지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구원을 사고파는 우리 자신, 구원으로 장사하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이러한 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하신 예수님의 명령에 순명한다면, 그분께서는 당신의 부활로 우리를 다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탈출해 홍해를 마른 땅을 밟고 건너는 기적을 경험했다. 그 뒤에 하느님은 시나이산에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셨다. 그때, 요즘 말로 하면 계약의 당사자 ‘갑’인 하느님이 당신을 이렇게 소개하셨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어떤 신상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고 말씀하신 후에)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탈출 20,2.3.5).”

 질투하는 하느님이란 우리가 다른 신을 섬기면 벌을 내리신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 말고 다른 신은 없다는 뜻으로 알아듣는다. 그 계약의 ‘을’은 우리다. 그 계약 내용은 이러하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탈출 20,5-6).” 이는 당신 말고 다른 신은 없으니, 그것을 따름은 헛된 일이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끝없이 자애를 베푸신다는 뜻이다. 이 계약은 하느님의 일방적인 계약이다. 하지만 이 또한 구원하는 신은 당신밖에 없다는 뜻이다.

      우리 중 십계명을 안 지키는 사람은 매우 적다. 혹시 어쩌다 한두 개 어겼다고 해도 금방 뉘우치고 잘 지키겠다고 다짐한다. 그런데 이는 하느님의 은밀한 계명이라기보다는 인류 보편적인 가치에 가깝다.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살인하지 않은 것에 만족하는 사람과 다 내주고도 더 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사람 중 누가 더 계명을 잘 지킨 것인지 안다. 누가 더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하느님 뜻에 순종하셨으니 그분은 하느님을 죽도록 사랑하셨다. 그 사랑이 당신 자신을 집어삼켰다. 시편 저자가 예언한 그대로다.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불태우고 당신을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제 위로 떨어졌습니다(시편 69,10).”

 

  성전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나고 사랑하는 곳이다. 하느님을 그토록 사랑하셨으니 그런 성전이 더럽혀지는 것을 그냥 보고 계실 수 없었다. 성전세는 이스라엘 화폐로만 내야 했으니 그 당시 통용 화폐인 로마돈을 환전해야 했고, 하느님께 바칠 제물을 집에서부터 끌고 오기 너무 힘드니 성전에서 살 수 있게 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게 크게 다르지 않으니 환전상들과 동물을 파는 이들 그리고 성전을 관리 운영하는 이들이 어떤 관계에 있었을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우리도 아는 걸 예수님이 모르셨겠나. 하지만 그들은 불법적으로 장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폭력적으로 다 내쫓으셨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는 거래나 흥정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그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다는 걸 알려주시는 것 같다. 하느님과 나 말고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는 곳, 그런 곳은 나 자신, 내 몸밖에 없다. 성전을 뒤엎으신 것도 성에 차지 않아 성전을 허물라고 하시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새로 세워진 성전이 바로 예수님의 몸이다(요한 2,22).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과 순수하게 만날 수 있다. 돈이 없어도, 특별한 곳에 가지 않아도, 꼭 성당이 아니어도 일하거나 걸어가면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성령이 머무시는 내 몸이 성전이 되었다.

     그런 소동 후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기적들을 많이 일으키셨고 사람들은 열광하고 당신을 따랐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아셨다(요한 2,24). 나타나엘을 한 번에 알아보셨고(요한 1,47), 제자 중에 믿지 않는 자들과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요한 6,64). 유다가 당신을 팔아넘길 것도 아셨다(요한 13,27).

   주님은 나를 아신다. 사람을 속이고, 나 자신마저도 속아 넘어가지만 주님은 못 속인다.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온전히 믿지 않는 줄 아신다. 아니 믿지 못하는 줄 아신다. 나를 부르신 하느님이 당신을 질투하는 하느님이라고 하신 건 그분 말고 다른 신은 없기 때문이다. 외아들까지 내어놓기까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하느님은 그분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계약을 맺으신 것은 그분 말고는 구원하는 신이 없기 때문이다. 폭력적으로 성전을 정화하신 건 내가 그렇게 깨끗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믿음은 계속 정화돼서 순수해져야 한다. 그래서 마침내 나의 하느님 사랑이 이웃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정도가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처럼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 저는 채찍이 아니면 당신을 따라오지 않는 고집 센 당나귀가 아니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앞에서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겁 많은 어린아이입니다. 이런 저와 눈을 맞추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 또한 세상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완전히 믿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말하지 않아도 저를 아십니다. 무슨 말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불쌍한 저를 대신해서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해 주십시오(로마 8,26). 저는 그저 주님만 믿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불신의 장애물을 넘어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시고 그 재미에 맛들이 게 도와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묵상,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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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성전을 정화하신 얘기입니다. 성전은 하느님과 만나는 특별한 장소이어야 하는데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이 성전 안에 가득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잡놈들이 가득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의 경우 성당에 무엇이 많은 것이 싫습니다.

성상이나 성화같은 예술품이 많은 것도 싫습니다. 그것들이 제가 하느님 만나는 것에 도움을 주면 좋겠는데 도움을 준다고 하는 것이 제게는 도움이 아니라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성당을 간 분들에게 이런 심한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거기에 예술품을 보러 간 것입니까? 주님을 만나러 간 것입니까?

주님을 만나러 꼭 거기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의 이런 도발적인 말은 주님을 만남에 있어서 정말 성화나 성상의 도움받는 분들에게도 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상은 그것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사람에게는 우상이 아니라 성상이지요. 그러나 그것을 통해 주님을 만나지 못하거나 방해받는 사람에게는 그저 예술품이거나 심지어 우상일 뿐일 겁니다.

아무튼 오늘 주님은 성전에서 잡다한 것과 잡놈들을 다 치워버리십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아주 과격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위선자들을 말로 세게 질타하신 적이 있으셔도

이렇게 과격한 행동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셔야만 했나 봅니다. 말로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하셨는데 말로는 안 됐나 봅니다. 그들의 돈 줄, 그들이 결코 놓을 수 없고 그래서 꽉 움켜쥐고 있는 것, 그래서 치워버리라고 말로 해서 안 되는 것은 주님께서 과격하게 치워버리십니다.

 

우리 인생에서 한순간에 모든 것을 폭삭 잃은 것도, 실은 내가 주님 대신 움켜쥐고 있던 것들이고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치워버리신 것들일 겁니다. 아무튼 이 정화사건 때문에 주님께 죽음이 닥쳐옵니다. 저라도 그러지 않겠습니까? 내 모든 것을 뺏어 간 주님을 그냥 놔두고 싶겠습니까? 당대 기득권자들도 이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이런 주님을 그냥 놔두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리고 무슨 권한으로 이런 짓을 했는지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고, 이에 주님께서는“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성전을 허물다가 당신 몸이 허물어지십니다. 아니, 당신 몸을 허물어서라도 성전을 허물려고 하신 것이고, 역사적으로도 로마의 침략으로 결국 파괴되고 맙니다.

이제 우리가 남았습니다. 우리도 허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당신 몸인 성전을 허무셨는데, 이것은 우리 안에서 잡것들을 치우라는 명령을 실행치 않으면 우리도 우리 몸인 성전을 허물어야 한다는 주님의 표징입니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치울 것인가? 허물 것인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OFM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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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시편19,8)

 

 신자가, 수도자가, 사제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되는 일은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참된신자라면 참된사람이겠고 이또한 평생과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참사람되는 평생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을 것입니다.

  89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참신자이자 참사람의 모범입니다. 하루하루 100% 삶을 사시는 분입니다. 세상에서 교황님보다 부지런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어제 접견시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좋으실대로(please)’ 그리고 ‘감사합니다(thank you).’두 말마디입니다.”

 

어린이들 접견시 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평범하나 친절한 말마디가 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합니다.

“정의를 행하는 것은 용기의 덕을 요구한다.” 교황청 사법의 해를 맞이하여 교황청 법조인들 알현시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교황님과 함께 광범위한 대화를 나눴음에 감사한다.” 교황님 알현후 하신 독일의 수상이자 사회민주당 정치가인 올라흐(Olaf)의 말입니다. 교황님은 사별가족들과의 접견중에는 이들이 기도중에 위로를 발견할 것을 격려했습니다. 오늘의 다산 어록과 공자의 말씀이 참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솔직하고 진심을 다할 때, 상대에 대한 진심도 흘러나온다(다산).” 자로가 군주를 섬기는 자세를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속이지도 숨기지도 말고, 바른말을 하는 것이다(공자)."

  아주 예전 변호사 사무소를 찾았을 때 벽에 걸려있던 액자 안에 ‘공선사후(私先公後)’라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아마도 그 변호사의 좌우명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요즘 공천파동중 회자되는 말마디가 ‘선당후사(先黨後私)’입니다.

모두가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선을 우선시하는 분별의 지혜를, 참사람의 도리를 알려주는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삶의 모습입니다. 참신자와 참사람이 분리된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며칠전 병원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던중 1회용 커피를 마시려고 물을 탔을 때 녹지 않아 웬일인가 당황했는데 무심코 찬물 꼭지를 눌렀던 것입니다. 좀 멀리서 노모와 함께 기다리던 젊은 자매가 급히 오더니 조용히 다시 다른 컵 따뜻한 물에 믹스커피를 타주고 앞서의 커피를 내다 버리고 제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사소한 일 같지만 얼마나 고맙던지 그 친절한 배려의 사랑에 제가 미혼의 젊은 사람이었다면 프로포즈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고, 아들이 있다면 며느리로 삼고 싶을 정도로 감동했습니다. 이런 깨어 있는 친절한 배려의 사람이야말로 참사람이자 참신자의 모범이겠습니다. 무엇보다 잘 떠나는, 마지막 잘 떠나는 죽음에서 드러나는 삶의 향기입니다.

    예수님은 떠나셨지만 온 인류에게 미사라는 참좋은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남기셨고 부활하시어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니 참으로 잘 떠남의 모범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처럼 잘 떠나는 참된신자로서의 삶이라면 그대로 참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참된 신자로 살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첫째, “성전사랑”의 삶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성전을 사랑합니다. 성전사랑은 성전정화로 자연스럽게 표현됩니다.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성전은 주님이 삶의 중심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주님을 사랑하듯 주님의 집이자, 기도의 집, 환대의 집, 평화의 집인 성전을 사랑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은 오늘 복음에서의 성전정화 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표출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환전꾼들을 내쫓으시고 비둘기 파는 가난한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는 말씀에 제자들은 즉시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을 알아 챘기에 저절로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라는 성경 말씀을 연상합니다. 세상을 성화(聖化)해야할, 세상의 마지막 영적 보루인 거룩한 성전이 속화(俗化)된다면 정말 대책이 없을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안에 다시 세우겠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마침내 당신 몸이 영원한 성전이 될 날을 내다보는 주님이시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 성전에 머뭄으로 이미 그 혜택을 풍성히 누리고 있습니다.

    건물의 성전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인 교회공동체가,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성전이니 성전정화의 개념은 참 넓습니다.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기이자 성전정화의 시기입니다. 회개의 열매는 보이는 성전정화는 물론 공동체 성전의 정화로, 그리고 극기, 절제, 선행, 단식, 기도, 자선 활동을 통해 각자 자기 성전정화로 드러나야 함을 봅니다.

 

둘째, “계명준수”의 삶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사랑함과 동시의 하느님의 계명을 사랑합니다. 십계명은 물론 주님의 계명은 한결같이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사랑 역시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계명준수의 구체적 실천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온 인류에게 주신 참 좋은 최고의 사랑 선물인 십계명을 소개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십계명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예나 이제나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공동체에 적용되는 참신자는 물론 참사람이 되기 위한 삶의 기본 자세에 대한 구체적 가르침이 십계명입니다. 무엇보다 십계명을 포괄하는 사랑의 이중계명인 경천애인과 황금률, 그리고 마태복음 산상설교중 진복팔단의 실천에 까지 이른다면 말그대로 금상첨화, 사랑의 완성이자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 될 것입니다.

 

셋째, “지혜추구”의 삶입니다.

자비와 함께 가는 지혜입니다. 삶의 지혜, 분별의 지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무지에 대한 답이 지혜요, 지혜 또한 하느님의 참 좋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은총의 선물이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입니다. 교회학자 축일시 새벽 독서기도 성무일도시 초대송 후렴과 아침기도시 성경소구도 은혜롭습니다.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께, 어서와 조배 드리세.”

 

“나는 지혜를 욕심을 채우려고 배우지 않았고, 이제 그것을 아낌없이 남에게 주겠다.

나는 지혜가 주는 재물을 하나도 감추지 않는다.

지혜는 모든 사람에세 한량없는 보물이며 지혜를 얻은 사람들은

지혜의 가르침을 받은 덕택으로 천거를 받아 하느님의 벗이 된다.”

(지혜7,13-14)

 

 하느님과 우정이 깊어지면서 지혜의 사람이 됩니다. 지식이 많아서가 아니라 지혜가 좋아서 교회학자임임을 깨닫습니다. 지혜중의 지혜가, 지혜의 결정체가, 하느님의 지혜가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역시 하느님의 지혜라 일컫는 예수님과 우정이 깊어질수록 지혜로움 삶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참된 신자로 살 수 있을까요?”

1.한결같은 성전사랑의 삶입니다.

2.한결같은 계명준수의 삶입니다.

3.한결같은 지혜추구의 삶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신자의 삶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의 규정은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시편19,9).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묵상, 성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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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학생 복사단 회식이 있었습니다. 고3이 되는 학생들이 복사를 졸업하고 마지막으로 후배 복사들과 식사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날의 메뉴는 자장면과 짬뽕이었지요. 그런데 한 친구가 너무 조심스럽게 먹는 것입니다. 보통 아이들은 급하게 먹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아이에게 “왜 이렇게 조심스럽게 먹어?”라고 물으니, “흰색 티셔츠를 입었거든요.”라고 답합니다.

 저는 아이에게 “어머니가 빨래해 주시잖아. 더러워지면 빨래하면 되니까, 음식이 흰색 티셔츠에 조금 묻으면 어때?”라고 하니, 아이는 곧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보기 싫잖아요.”

 

묵상 중에 이 아이의 말이 계속 생각났습니다. 음식 묻으면 빨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음식 묻은 옷을 입고서 돌아다닐 자기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이 보기 싫다는 것이지요. 이 말에 우리 마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깨끗해집니다. 그러나 죄를 더 짓지 않으려는 노력보다, ‘나중에 고해성사 보면 되지.’라는 안일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을 만나곤 합니다. 이 죄를 짓는 내 모습이 과연 예쁠까요? 아닙니다. 분명히 보기 싫은 모습이고 그래서 죄를 짓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짓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분명한데, 너무 쉽게 죄에 무감각해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쓸데없는 것에만 집중하면서 정작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보면 너무 화가 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는 장면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휘두를 정도로 화가 나셨을까요? 이 성전 안에 하느님의 사랑보다는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난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죄를 씻기 위해 희생 제물을 봉헌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양과 소, 비둘기 등이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 봉헌물을 판매하면서 누군가는 자기 탐욕을 채우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가난한 사람은 그 돈을 낼 수가 없어서 죄스러운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오히려 죄인으로 고개를 들 수 없는 상황이 과연 예수님 보시기에 좋았을까요?

이런 탐욕과 이기심이 난무하는 곳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사랑의 실천과 나눔을 통해서만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 김대건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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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사순 1주일부터 구약의 인물들을 우리가 바라보고 있습니다. 1주일에는 노아에 대해서 우리가 바라봤었죠. 노아의 홍수로 이 세상이 상처받았고 하느님께서 그 상처를 낫게 하셨음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세례의 예표였고 이 세례를 통해서 우리도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었음을 되새겨 보았죠.

지난 주일에는 우리가 아브라함에 대해서 바라보았습니다.

세상 무엇보다 사랑하는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그 아브라함에게서 그 아들 예수님을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고요.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 뜻대로 자신을 재물로 봉원하는 그 이삭의 모습에서 십자가의 제물로 자신을 동원하시는 예수님의 그 희생과 상처, 또 그것을 감내하시는 사랑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프란치스코의 오상 800주년 주제처럼 '상처에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낫게 하시리라는 희망과 또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것이 필요하고 이 사랑과 희망이 우리를 다시 일어나게 한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오늘사순 3주일에 등장하는 구약의 인물은 '모세'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소위 10계명을 말씀하시는 장면이죠.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는 내용입니다.

그 계약의 내용은 오늘 독서 바로 앞에 장에 나오는 내용의 말씀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 계명들을 지키면 하느님의 소유가 되는 백성, 즉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고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계약의 주체는 하느님이셨죠. 이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곳에서 이끌어낸 주님이신 하느님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하늘의 별들과 바다의 모래처럼 되었지만, 이집트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됩니다. 자기네 땅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집트에서 종살이하고 있었죠. 그들의 부르짖짐을 들으시고 또 그들을 잊지 않으신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나이 산에 도달했을 때 이 계약을 맺으신 것이죠.

너희가 똑똑히 본 것처럼 내가 이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집트에서 끌어낸 것처럼 계속해서 너희와 함께 있겠다. 다만 너희는 내가 말하는 이것만 잘 지켜달라라고 하신 것이죠.

    그런데 하느님과 인간이 맺은 이 계약은 언제나 인간 편에서 깨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충실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조금만 살기 괜찮아지면 하느님의 말씀에 등을 돌리곤 했죠.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가들은 나중에 겪게 되는 바벨론 유베도 하느님과의 계약을 지키지 못한 탓으로 그렇게 해석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버리시거나 잊지 않으시고 언제나 다시 그분의 백성으로 되돌려 놓으십니다. 바빌론 유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파괴되었던 성전을 다시 세우게 됩니다. 이 성전은 하느님의 현존,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에 대한 표증이었습니다. 그 성전의 유래는 이렇죠. 이집트에서 불러내신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돌판에 친히 계명을 되새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을 궤에 넣어서 보관하였죠.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계약의 궤이고 이 교회를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들 가운데 모시고 다녔습니다. 사막 가운데 멈춰 있을 때는 성막을 지어서 그 궤를 거룩하게 모셨습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고, 성막 안에서도 하느님의 궤가 모셔진 곳은 또 따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이 성막은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에 다윗까지 이어지고 솔로몬이 이제 성전을 지어서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하느님의 궤, 이 계약의 궤를 성전 안에 모시게 됐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상인들을 쫓아내시는 이 성전이 바로 그 하느님의 성전이죠. 물론 정확히 솔로몬의 그 성전은 아닙니다. 바빌론 유배 때 솔로몬의 성전이 파괴되고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재건되고 중축이 되는 그런 성전이죠.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거기서 체험한다는 의미에서 그 결을 같이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옛 성전의 이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하십니다.

이제 하느님의 성전은 지상의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 됩니다. 완공되는 데 46년이나 걸린 성전을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현존의 의미를 새롭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느님 현존의 표징인 계약의 궤가 모셔진 성막을 라틴어로 타베르나쿨룸(tabernaculum)이라고 합니다. 이 용어는 현대의 그대로 감실에 쓰입니다. 예수님의 몸인 성체가 모셔진 저 감실을 똑같이 타베르나쿨룸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tabernacle'(테버네클)이 어원이 똑같죠. 구약의 그 계약의 궤 성막이 지금의 감실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판에 새겨진 그 문자 10계명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새로운 계약을 세우셨습니다.

그 계약의 표시가 바로 십자가이죠.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넣어주시고 상처받으시고 피 흘리심으로써 친히 계약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새 계약의 표징이 스스로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해석하신 구약의 10계명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이 됩니다. 한마디로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새 계명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많은 순간들을 살고 있습니다. 남을 험담하거나 남을 미워하고, 남에게 불평하고 불만을 가지고 있고, 많은 순간에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보다 우리 관심사에 더 집중하는 그런 순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에 성전을 정화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마음의 성전을 정화시켜주십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오늘 독서는 아니지만 다른 구절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매 순간 정화되어 있는 그 상태로 살아가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이렇게 주일에는 성당에 와서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가 되셔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 마음의 성전을 정화시켜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집 즉 '성전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셨던 것처럼

하느님의 성전인 '우리 마음에 대한 열정' 또한 가득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지저분한 것들을 모조리 엎어버리길 원하십니다. 우리 마음이 어수선한 그런 시장통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 이야기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을 다 알고 계시고 사람 속에 들어있는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서 무엇이 우리를 시끄럽게 하고 또 괴롭히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그것을 지워주십사 정화해 주십사 기도하면서 서로 사랑하려는 노력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의 성전을 바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새로운 계약의 표정인 십자가와 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느님의 힘이시고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힘을 과시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또 박식한 설교를 하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우리가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약해 보이고, 또 어리석어 보이는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는 힘과 지혜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십자가의 역설'이죠. 십자가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또 상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수선하고 더럽혀진 우리 마음의 성전은 예수님에 의해서 언제나 정화될 것이고 언제나 새롭게 될 것입니다.

   오늘 미사를 통해서 우리 '마음의 성전'을 다시 깨끗이 함으로써 주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어가셔서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순 시기의 또 한 주간을 잘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박명진 요셉 신부님 미사 강론 中,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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