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3월 5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복음ㆍ독서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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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5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복음ㆍ독서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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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5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복음ㆍ독서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5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복음ㆍ독서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5일 화요일 매일미사 오늘의 복음 묵상 (바로가기)

[            목          차                     ]

2024년 3월 5일 화요일 제1독서 (클릭)

2024년 3월 5일 화요일 복음 (클릭)

가톨릭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보러 가기

최문기 마티아 신부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OFM, 작은 형제회) 보러 가기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님, CPBC평화방송 미사中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보러 가기

 

 

2024년 3월 5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받아 주소서.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25.34-43

그 무렵 25 아자르야는 불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입을 열어 이렇게 기도하였다.

34 “당신의 이름을 생각하시어 저희를 끝까지 저버리지 마시고 당신의 계약을 폐기하지 마소서.

35 당신의 벗 아브라함, 당신의 종 이사악, 당신의 거룩한 사람 이스라엘을 보시어 저희에게서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마소서.

36 당신께서는 그들의 자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37 주님, 저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저희의 죄 때문에

저희는 오늘 온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38 지금 저희에게는 제후도 예언자도 지도자도 없고 번제물도 희생 제물도 예물도 분향도 없으며 당신께 제물을 바쳐 자비를 얻을 곳도 없습니다.

39 그렇지만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 주소서.

40 이것이 오늘 저희가 당신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 되어 당신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하소서.

정녕 당신을 신뢰하는 이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41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얼굴을 찾으렵니다.

저희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42 당신의 호의에 따라,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희를 대해 주소서.

43 당신의 놀라운 업적에 따라 저희를 구하시어 주님,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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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시기

2024년 3월 5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복음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21-35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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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5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조건 없는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만 탤런트’를 빚진 종의 비유로 이러한 가르침을 주시는데, 만 탈렌트는 ‘일억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일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라고 할 때 백 년을 일하여야 벌 수 있는 금액이 삼만 육천오백 데나리온입니다. 그런데 일억 데나리온을 빚졌다면, 이는 평생을 일하여도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막대한 빚입니다. 결국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줍니다. 한번 상상을 하여 볼까요? 빚을 갚을 길이 없어 자신은 물론이고 ‘아내와 자식까지 팔아야 하는’ 채무자에게, 채권자가 “가엾은 마음이 들어” 이를 모두 탕감하여 준다면 그는 어떤 심정이 될까요? 그러나 이 종은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자 그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주인은 종의 빚을 탕감하여 주었는데, 같은 종들 사이에서는 이런 자비와 탕감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간절함을 아시고(제1독서, 아자리야의 기도 참조), 가난을 볼모로 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 자신을 희생하시어 인간을 가장 안전한 상태에 있도록 배려하시지만, 인간은 상대의 간절함을 이용하고 착취하며 파괴합니다. 같은 동료에게 가혹하게 굴었던 종의 소식이 전해지자 비유는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베풀었던 용서와 탕감을 거두어들입니다. 우리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하여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상대가 회개하였거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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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말은 듣기에는 아름답게 들리지만, 현실에서는 고통스럽고 때론 가혹한 일이기도 합니다.

용서는 상처 입은 자가 상처를 준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만약에 상처가 아주 작아서 그렇게 아프지 않거나 아니면 시간이 오래 지나서 상처가 희미해졌을 때라면 용서가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내 상처는 아프고 피가 흐르는데 그 모든 것을 스스로 감당하면서 상처의 고통을 준 그 대상을 용서하는 일이 그렇게 아름다울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용서는 하느님의 몫이고, 인간은 그저 망각할 수 있을 뿐이라 말합니다.

사실상 인간에게 진정한 의미의 용서는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저도 제 자신의 삶에서 진정한 의미의 용서를 한 적이 있었는가를 되돌아보았을 때 그 기억이 쉽게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7번에 77번까지 용서하며 심지어는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이 불가능한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동기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십니다. 복음 속 비유에는 주인에게 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나옵니다. 만 달란트는 지금의 가치로 어마어마하게 큰돈입니다.

이 큰 빚 앞에서 종은 "제발 참아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라고 애원을 합니다. 종은 빚을 탕감해 달라고 청한 바가 없습니다. 그저 잠시 참아줄 것을 청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가 가엾어 보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큰 빚을 탕감해 줍니다. 종이 청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종은 백데나리온을 빚진 자신의 친구에게 눈꼽만큼의 자비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백데나리온이 아주 작은 돈도 아니고 제때 돈을 갚지 못한 그 친구가 잘못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를 감옥에 가둔 종의 처신이 옳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친구를 감옥에 가둔 이 종의 처신은 주인이 자신에게 베푼 그 자비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종이 빚을 갚지 못한 친구를 감옥에 가두는 것이 정당하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을 했다면, 그 정당함과 옳음은 당연히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결국 주인은 종에게 베푼 자비를 거두어 드립니다.

만약 그 종이 주인에게 받았던 그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기억하고 또 감사하고 있었다면, 자신에게 빚을 진 그 친구에게도 너그러워야만 했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원수를 제한 없이 용서한다는 것은 인간의 인격과 인내심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이미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과 자비를 입은 자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느끼고 있는 이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자신을 아프게 한 일을 기쁘게 용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이미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음을 알고 있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그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임을 드러내는 가장 뚜렷한 표정이 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듯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사람들이 너희가 나의 제자임을 알게 하여라"라는 이 최후의 만찬 석상에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제한 없이 용서하는 모습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나게 됨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잘 살고 있는지를 식별할 수 있는 확실한 기준도,

"내가 얼마나 하느님 사랑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그 사랑의 힘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고 있는가"를 달려 있음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날들이 충실한 제자의 삶이 될 수 있도록 늘 주님 사랑 안에 머물면서 그 기쁨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최문기 마티아 신부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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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는 불가마 속에 곧 죽게 될 절체절명의 상태에서 세 청년을 대표하여 아자르야가 바치는 절절한 기도입니다. 

인간적으로만 보면 너무도 불행한 처지이기에 매우 두렵지만 그래서 막상 제가 이런 처지가 된다면 제가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런 처지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선 아무것도 없는 상태 곧 가난한 처지에 처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즈카르야는 이렇게 이스라엘의 가난을 얘기합니다.

 

“지금 저희에게는 제후도 예언자도 지도자도 없고 

번제물도 희생 제물도 예물도 분향도 없으며 당신께 제물을 바쳐 자비를 얻을 곳도 없습니다.” 

 

즈카르야는 물질적 가난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물질적으로도 가난했겠지만 우리의 박해 시대처럼 교회가 완전하게 파괴되어 성직자와 교계 제도도 없고 성전도 없어서 제물도 없고 제사도 드릴 수 없게 된 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난이 이스라엘을 겸손케 했습니다. 그래서 이에 관해 즈카르야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주소서.”

 

그렇습니다. 가난이 겸손케 하고, 겸손이 진정 하느님 앞에 서게 합니다.

그리고 겸손이 어제 수많은 예물과 군대를 거느리고 나타난 나아만과 달리 그런 것 없는 자신 그러나 마음만은 진실한 자신을 봉헌케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 영적인 갈망이 최고조인 상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얼굴을 찾으렵니다.”

 

제가 부러운 것이 이것이고, 이 때문에 두렵지만 이런 상태가 되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사실 저는 너무 부자이고 여러분도 그럴 것입니다. 과거에 비하면 물질적으로도 무척 아니 너무 부유하고 신앙 환경은 더더욱 부유해졌고 어찌 보면 넘쳐납니다.

사제도 많고, 성당도 많고,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나 피정 프로그램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신앙심은 굳건하지 않고 갈망은 없습니다. 이제는 뭔 배인지 모르기만 배가 불러서 미사가 있어도 가지 않고, 좋은 교육 프로그램이 있어도 가지 않으며 골라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뭐가 많아도 마음이 없고 갈망이 없는 것이 문제인데 실은 너무 뭐가 많아서 마음도 없고 갈망도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싫고 그런 상황이 닥칠까 두렵지만 가난한 처지와 겸손한 마음을 주십사고 기도하는 오늘 저이고, 주님의 가르침대로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저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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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연로한 교우가 자꾸 잊어버려서 속상하다고 했다.

이젠 기도문도 까먹어 죄스럽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괜찮다고 위로하며 그 대신 다른 건 다 잊어버려도

‘참 좋은 하느님’만 기억하고 있으면 된다고 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자녀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공동체지만 한 분이신 하느님이다. 완전한 사랑이 세 분을 하나가 되게 했다. 하느님을 닮아 우리도 서로 사랑해서 하나 된다. 아니 그렇게 되려고 온 힘을 다해 노력한다. 하느님이 너그러우신 것처럼 나도 너그러워지도록 애쓴다.

  그 노력의 시작은 자기 성찰인 것 같다. 내가 하느님께 용서받았고,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입었음을 기억한다. 오늘 복음처럼 갚을 수 없는 빚, 천문학적 숫자의 빚을 탕감받았음을 잊지 않는다. 사는 게 죄라는 어르신들의 고백은 넋두리나 죄의 고백을 피하려는 꼼수가 아닐 거다. 나는 나의 죄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홀로 있는 조용한 시간이면 어김없이 그 기억들로 몸서리친다. 그때 그 자리로 되돌아가서 그 말과 행동을 바꾸어 놓고 싶은 마음에 괴롭다. 더 비참하게 하는 것은 아직도 그러고 있고 여전히 유혹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그 괴로움을 견디면서 있는 힘을 다해 하느님이 용서하셨음을 믿는 거다. 믿기 어려운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거다.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제물은 하나, 뉘우치고 통회하는 마음 그리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 주소서(다니 3,39).”

 

  그리스도인은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우리의 사랑은 서로 좋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나와 다른 이를 이해하고, 불편함을 견디며 인내하고, 나의 불편함을 알 리 없는 그를 용서함에 더 가깝다.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건 하느님을 몰라도 한다. 서로 좋아 죽는 공동체보다는 싫어도 그와 함께 있는 공동체가 더 현실적이고 건강한 것 같다.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기 때문이다. 교회는 삼위일체 완전한 공동체 하느님을 닮으려고 노력한다. 몸에 혈액과 기의 순환이 잘 돼야 건강한 것처럼 교회에는 사랑과 자비가 우리 사이에 늘 흐르고 있어야 하느님이 세상에 드러나신다.

 

예수님, 제가 세상살이에서 남길 수 있는 것은 자비와 용서뿐입니다. 제가 이웃에게 베푼 자비는 그의 기억 속에 남고, 제가 한 용서는 하느님의 마음속에 남습니다. 용서가 아니라 이해하려는 노력과 인내입니다. 그것을 통해 제가 만 탈렌트의 빚을 탕감받았음을 잊지 않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미움과 복수심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시고 용서하려는 마음이 생기게 도와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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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시편 17,8)

 

“너 자신을 알라” 자기를 아는 자기 인식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날마다 묻는 자가 수도자라 했습니다. “나는 왜 여기와 있는가?”, “나는 이렇게 살아도 되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양상은 다소 달라도 날마다 물어야 할 절박한 물음입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생각이 있는, 의식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날마다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가장 쉬운 것이 남 판단하는 것이요, 가장 어려운 것이 자기를 아는 일입니다. 남을 판단하지 않고 자기를 아는 이들이 참으로 지혜롭고 겸손한 이들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하고 교만한 사람이 남을 판단하지,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지혜롭고 겸손한 사람은 결코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제 좋아하는 말마디 셋이 배움, 섬김, 여정입니다. 배움의 여정, 섬김의 여정 중에 날로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이 제 소박한 소원입니다. 오늘 다산 어른의 하루에 나오는 말마디들 역시 현자의 마음이자 하느님의 생각을 반영합니다.

  • 사람의 가치는 무한하기에 지위로 구분할 수 없다. 굳이 순서를 매기자면 가장 약한 사람이 먼저이다. (다산)
  •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다음이며 군주가 가장 가볍다.(맹자)

60년 이상 한결같이 생명운동에 전념해 온 큰 어른 정성헌 선생의 귀띔 40가지 중 열만 인용합니다. 자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같은 잠언입니다.

 

 1. 보고 싶은 사람이 돼라.

 2. 남이 있어야 내가 있다.

 3. 다른 사람을 자기처럼 아껴라.

 4. 따뜻한 사람이 돼라.

 5. 크고 깊은 사람이 돼라.

 6. 마음의 스승을 모셔라.

 7. 욕심을 버려야 평화로워진다.

 8. “오죽하면 그러겠냐”는 측은지심을 지녀라.

 9. 그윽하고 큰 꿈을 꾸고 말하자.

 10. 스스로, 함께, 꾸준히.

 

40가지 중 10가지만 선정했는데 나머지 30가지 잠언도 금과옥조의 말씀이요 그대로 하느님의 생각도 이와 같으리라는 느낌이 듭니다. 정말 무지가 큰 병입니다. 무지의 병, 무지의 죄, 무지의 악, 제가 참 많이 배우고 인용한 동방영성에서 특히 강조하는 무지입니다. 어제도 무지에서 파생되는 온갖 불행과 비극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오늘날 세계나 국내의 혼란도 인간 무지의 결과임을 봅니다. 전쟁이나 약육강식의 ‘문명의 야만’이란 역설도 무지의 악에서 기인합니다. 참으로 치유받아야 할 불치의 병이 무지같습니다. 무지한 인간, 부정적 사람의 정의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이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아무리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무지한 인간이 물음이라면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느님이 답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이요,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이래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아가는 평생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사람이 되는 공부요,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공부입니다. 이 공부에는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데 여전히 미완의 존재로서 인생 학교 마치는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바로 무지의 절정을 보여주는 오늘 복음의 만탈렌트 빚을 탕감받았다 취소되는 무자비한 종입니다. 만탈렌트 빚을 탕감받은 사실을 까맣게 잊고, 백데나리온 빚진 자에 대한 무자비한 처사가 공분을 일으킵니다.

    그대로 무지하고 인색한 인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만탈렌트 한량없는 사랑의 빚을 지고 탕감받고 살아가는, 끊임없는 용서를 받고 살아가는 우리임을 생각한다면 하느님께는 끝없는 찬미와 감사요, 이웃에게는 참으로 자비로워야 할 것입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무한히 자비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숨 쉬듯이 밥먹듯이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한량없는 용서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끊임없이 사랑받고 있기에 사랑해야 하며, 끊임없이 용서받고 있기에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의 의무, 용서의 의무입니다. 오늘 복음의 무자비하고 인색한 종에 대한 주인의 질책은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에 대한 질책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러할 것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가 안되더라도 용서의 지향을 던져 놓고 보는 것입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용서할 날이 올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 이 또한 무지의 소치입니다. 결국은 무지가 문제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공부, 끊임없는 회개와 끊임없는 용서뿐입니다. 기도와 공부, 회개와 용서를 통한 겸손의 하느님 은총만이 무지에 대한 유일한 처방입니다.

  바로 그 기도의 모범, 회개의 모범, 겸손의 모범이 제1독서 바빌론 유배 중 불타는 화덕 속에서 기도하는 다니엘의 세 동료 중 아자르야의 기도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불후의 기도가 다니엘서 3장의 아자르야와 세 동료의 하느님 찬미기도입니다. 이런 기도 역시 배워서 훈련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구구절절 심금을 울리는 진실하고 아름다운 회개와 겸손의 기도가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겸손의 자기 인식의 절정에 도달한 경지를 보여줍니다. 무지의 병을 온전히 치유하는 기도입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이 아깝지만 마지막 부분이 특히 아름답고 감동적이라 그대로 인용합니다.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얼굴을 찾으렵니다. 저희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당신의 호의에 따라,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희를 대해 주소서.

당신의 놀라운 업적에 따라 저희를 구하시어, 주님,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하느님께 흠숭과 공경을 다하는 하느님 중심의 참 아름답고 깊은 감동적인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겸손의 절정에 도달한 경지입니다. 다니엘서 3장 26-44절까지 아자르야의 노래기도와 이어지는 다니엘의 동료 세 젊은이들의 3장 52-90절까지 하느님 찬송, 찬양기도 역시 참으로 놀랍고 아름답습니다.

   불가마 속에서 이들이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음은 기도의 힘, 하느님의 힘이었습니다. 연옥 같은, 지옥 같은 세상 불가마속에서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하느님 찬미와 감사, 찬양기도뿐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찬미와 감사의 미사은총이 무지의 병을 치유하여 우리 모두 참된 겸손의 자기 인식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나는 누구인가?' 단적으로 우리 믿는 이들의 공통적 신원을 말하면 나는 '주님의 평생 전사', '주님의 평생 학인', '주님의 평생 형제'입니다. 이를 노래한 제 좌우명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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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사순시기 세 번째 주간 화요일입니다. 오늘 다니엘서에서 기도의 모델, 모범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를 아자르야의 기도를 통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속죄의 기도입니다. 일종의 속죄 기도 아자르야는 '불 한가운데 입을 열어' 기도를 바쳤다. '당신의 이름을 생각하시어 저희를 끝까지 저버리지 마시고' 일종의 속죄 기도죠.

 속죄를 위한 용서해 달라는 거 탄원 기도이면서 청혼 기도이면서 '당신의 계약을 폐기하지 마소서.' 계약을 기억하라는 거죠. 그리고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우리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저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구세사를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당신의 놀라운 업적에 따라 저희를 구하시오. 오늘 다니엘서 3장 42절부터 43절 이야기입니다.

주님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여기 에제키엘서 36장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잘 바빌론 유베 전후 그때 이야기죠. 이스라엘 이제 내가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고 너희가 다시 행복하게 해 주겠다. 너희 때문이 아니다.

 너희는 내가 내 이름을 드러내라고 선택된 민족인데, 내가 너의 이스라엘 민족, 유다 민족을 선택했는데, 만방에 가서 뭇 민족을 이방 민족은 유다인들이 볼 때, 이방민족을 하느님께 불러드리고 너희가 빛이 되라고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라고 (마태복음 5장 14절) 했는데, 그런데 내 이름을 더럽혔다. 저 이방인들한테 가서, 이방인들에게 빛이 되어 나에게 오도록 하여 "이스라엘의 하느님, 주 하느님을 믿는 백성은 다르구나."라고 하며 주님께 오도록 해야 되는데 우리가 망쳤다. 내가 너무 실망했다. 그래서 이제는 너희들한테 기대할 게 없다. 이방인 백성만도 못한 내 백성이 이스라엘아. 그러니 에제키엘서 36장 19~20절부터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이제는 너희들 때문이 아니다. 자비가 아니라 내 이름을 위해서 이 거룩한 이름, 너희들이 더럽게 하고 망친 이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 내가 이제 너희를 해방시켜 주고, 너희에게 기쁨을 주겠다는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비에 대한 얘기죠. 어떤 분들이 기도가 잘 안 될 때 "신부님 어떻게 기도가 잘 안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분심이 들고, 뭐 안 되고" 기도가 뭡니까? 여러 가지 방식이 있겠지만 묵상 기도도 있고, 혼자 하는 관상 기도도 있고 다 있지만, 속죄를 용서해 달라는 그런 기도 또 감사 기도도 있고 그렇죠. 찬미기도, 여러 가지가 같이 하는 기도도 있고, 혼자 할 수 있는 기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기본적인 성경을 읽는 겁니다. 성경을 읽으면 그게 기도죠. 그 안에 다 나오잖아요. 하느님의 역사가 나와 구세사의 역사가 다 나와요. 요즘같이 전쟁, 분쟁 다툼, 싸움, 거짓, 위선, 폭력, 이런 것들이 막 성경 안에 다 들어 있죠. 어떤 사람은 하느님 역사인데 왜 이렇게 싸움이 있습니까? 인간의 역사니까 그렇겠죠. 그런데 그 안에서 주님께서 서로 위해주고 사랑하고 살으라고 우리에게 좋은 길을 보여주시는 거죠.

예언자들을 통해서 사제들을 모범을 보이지 않았어요.

구약에서 몇 사람 빼놓고 그 집회서에 보면 구약의 다윗 임금과 히즈키야 임금과 요시야 임금 세 사람만 잘 살았다. 나머지는 다 딴 길을 갔다 이렇게 평가하지 않습니까? 지도자의 길이 그렇게 어렵습니다. 우리도 각자 지도자죠. 가정에서 엄마로서 집안에서 살림을 맡고, 아빠로서, 주일학교 교사로서, 사제로서 어디서나 우리는 나름대로 각자 지도자이죠, 그죠. 기도가 잘 안 될 때 성경을 읽는다. 또 오늘 1 독서 다니엘서 3장이 아주 모범적인 기도의 양식이 됩니다. 읽으면 되는 거죠. 시편 곳곳에 나오죠.

기도의 양식도 시편뿐 아니라 성경 전체가 어떤지 이스라엘 역사, 구세사 인간의 역사, 최악의 역사 그리고 그 타락한 역사에서 오늘도 그 이야기하듯이 우리 조상들이 잘못 살아서 우리가 이렇게 됐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다가가서 "빛을 비춰주십시오." 그 길로 가는 거죠. 주님께로 가기 위한 몸부림, 그게 기도입니다. 그리고 여기 오늘 마태복음 18장의 내용들은 대개가 용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묻죠? 일곱 번씩 내 원수 같은 사람, 맨날 나하고 의견도 안 맞고 하는데도, 약속도 안 지키고, 거짓말도 하는데도 내가 일곱 번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이에 일곱 번씩 일흔 번,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죠.

'한없이' 하라는 거죠. 한없이, 제한 없이. 참 어렵고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마태복음 18장에서 길게 전해주죠.

 어떤 사람이 만 탈렌트이 있는데, 엄청난 돈이죠. 구약에 같으면 안식일 빼놓고 일할 수 있는 날이 20년입니다. 근데 백데나리온, 100일 치 석 달치, 20년 해도 못 보는 만달렌트를 용서받고 가서 조금 가지고 한몇 달 하면 되는 거 빚진 거 가지고 뭐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는가요?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와 사랑과 치유는 늘 일어나는 데 감기 걸렸다가도 치유되고, 상처 입었다가도 없어지는 것 이것이 몸과 마음에도 용서가 아닙니까? 근데 우리는 그거 다 낫게되면 잊어버리죠.

 이렇게 어쩌면은 하느님으로부터 만 탈렌트보다 더 많은 축복을 입고도 감사하지 않고, 어쩌면 우리와 저 개인에게도 주님께서 묻는 질문이요 복음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18장 그래서 또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무슨 병에 걸리게 되면 치유를 원하죠. 근데 그 치유가 많은 경우 겉으로 다치기도 하고, 감기에 걸렸든, 코로나에 걸렸든, 암 수술을 했든 '감사'가 부족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감사' 자체가 '주님께 용서를 청하는 것이지요. 몸도 낫기 시작합니다.

벌써 내 마음에 있는 누가 잘못한 것을 붙들고 가면, '이거 내가 언제 한번 그냥 놔두면 안 된다. 두고 보자.' 그러는 순간에 몸이 경직되고 암 세포가 더 늘어나죠. 그런데 "괜찮아 나도 더 잘못했는데 뭐 상황이 어려웠었나 봐."하고 용서를 베풀면 싸움도 없는 거죠. 공산주의는 그래서 용서를 못하는 거예요. 더 가지려고, 먹으려고 하고. 그래서 공산주의에서 싸움이 나고, 난리가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야죠. 우리 북한과 남한도 남쪽에서도 서로 진실하게 거짓말하지 말고, 속이지 말고, 남 위에 올라서려 하지 말고, 폭력 하지 말고, 각자 무더기로 패거리 싸움하지 말고 우리끼리 잘 살면 북한에서도 조금은 회개할지도 모르죠. "야 저렇게 잘 살아?"그러겠죠.

우리 안에서도 이 편 저 편 나누고 그러지 않습니까? 용서가 없어서 그렇죠. 조그만 거 갖고도 그러니까.

 '용서를 하면 녹는다.' 저는 가끔 그런 얘기합니다. 암덩어리가 녹죠. 항암제 아무리 맞아도 경직되죠. 미움이 쌓여 있으면 용서가 없고, 그게 더 덩어리가 지죠, 약으로 됩니까?

그게 아무리 약이 좋아도 의사 선생님이 아무리 애써도 용서가 없으면 어렵죠.

우리가 얼굴에 인상을 쓰고 하면 소화가 됩니까? 안되죠. 그러니까 오늘 우리 교우님들 '내려놓는' 바로 그것이 용서이고, 나를 위한 용서이고, 친구를 위한 용서고 우리 집안 식구를 위한 용서고 세상의 평화를 위한 용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님, 인천교구 역곡2동 본당 주임/CPBC미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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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자매님께서 젊었을 때, 남동생이 사고로 하늘나라에 가버려서 어린 조카들을 맡아 키웠다고 합니다. 남의 자식을 함부로 대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또 너무나도 사랑하는 남동생이기에 조카에게 자기 자식들보다도 더 먼저 챙겨주는 등 신경을 써서 키웠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녀들이 “우리가 의붓자식이야?”라며 어릴 적에 불만을 많이 표시했었다고 합니다.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남동생의 아들을 잘 키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조카가 성인이 되어 의사가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친척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오랜만에 만난 고모인 자기에게 인사는커녕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 자녀보다 더 신경 써서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본인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나 봅니다.

아무튼 이 자매님은 너무나 섭섭했습니다. 그래서 친한 친구에게 이 서운한 마음을 이야기했더니, 친구가 “만약 다시 남동생 죽었을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조카를 받을 것 같아?”라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이 자매님은 한참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조카가 커서 나를 섭섭하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맡을 거야.” 이 모습이 가치 있는 삶입니다.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 그냥 ‘사람’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진짜로 가치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하시지요. 가치 있는 삶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한 없이 용서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한계를 두지 않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묵상해야 합니다.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사랑을 주시는 모습을 우리는 복음에서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에, 구원의 길에서 제외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큰 빚을 탕감받고도 동료의 작은 빚을 참지 못하는 못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한 모습으로, 절대 가치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가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모습은 어떨까요? (조명연 마태오신부님(빠다킹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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