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22일 매일미사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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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5년 9월 22일 매일미사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5.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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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22일 매일미사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2025년 9월 22일 매일미사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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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22일 매일미사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제1독서

2025년 9월 22일 매일미사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제1독서

주님의 백성에 속한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님의 집을 짓게 하여라.

▥ 에즈라기의 시작입니다. 1,1-6

1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제일년이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리하여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도 반포하였다.

2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3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이제 그들이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집을 짓게 하여라. 그분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4 이 백성의 남은 자들이 머무르고 있는 모든 지방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계시는 하느님의 집을 위한 자원 예물과 함께, 은과 금과 물품과 짐승으로 그들 모두를 후원하여라.”

5 그리하여 유다와 벤야민의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과 사제들과 레위인들, 곧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곳에 계신 주님의 집을 짓도록 하느님께서 마음을 움직여 주신 이들이 모두 떠날 채비를 하였다.

6 그러자 이웃 사람들은 저마다 온갖 자원 예물 외에도, 은 기물과 금과 물품과 짐승, 그리고 값진 선물로 그들을 도와주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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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22일 매일미사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복음

2025년 9월 22일 매일미사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복음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6-18

1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17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18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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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22일 매일미사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2025년 9월 22일 매일미사 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사람들과 어울려 더불어 살아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혼자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인간관계가 어렵다고 해서 끊어 버리면 우리는 점점 죽어 갑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꽃피우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가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다름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름에서 오는 문제를 자기 기준으로만 보면서 “저것은 틀렸다.”라고 할 때 갈등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소통이 반드시 필요한데 이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내가 너와 만날 때 우리는 두 명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여섯 명이 만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내 안에는 ‘내 부모님의 생각과 가치관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나’가 있고, 사랑받은 경우도 있고 상처받은 경우도 있는 ‘어릴 적의 나’가 있으며, ‘어른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이 세 가지 자아를 다 인식하지도 못해서 자기 자신마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 여러 자아 때문에 관계와 소통이 얽히고설키게 됩니다. 참 어렵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관계를 맺고 소통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관점으로 보고 듣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똑같은 모습으로 같은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저마다 자기 관점으로 보고 듣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고 듣지 않고 ‘해석합니다’. 이 해석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우리는 행복에 행복을 더해 갈 수도 있고, 불행에 불행을 더해 갈 수도 있습니다.

내 관점, 곧 해석의 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루카 8,18). (김태훈 리푸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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