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3월 4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독서ㆍ복음 오늘의 묵상
본문 바로가기
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4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독서ㆍ복음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26.
반응형

2024년 3월 4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독서ㆍ복음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4일 매일미사

 

2024년 3월 4일 월요일 매일미사 오늘의 복음 묵상 (바로가기)

 

[                      목          차                   ]

2024년 3월 4일 제1독서 (클릭)

2024년 3월 4일 복     음 (클릭)

가톨릭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보러 가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OFM, 작은 형제회) 보러 가기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보러 가기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김동규 바오로 신부님, 의정부교구/서울대교구 대신학교 영성부장

최우식 프란치스코 신부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반응형

 

 

2024년 3월 4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제1독서

제1독서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7 참조)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5,1-15ㄷ

그 무렵 1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은 그의 주군이 아끼는 큰 인물이었다.

 주님께서 나아만을 시켜 아람에 승리를 주셨던 것이다.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 환자였다.

2 한 번은 아람군이 약탈하러 나갔다가,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아 왔는데, 그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 곁에 있게 되었다.

3 소녀가 자기 여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르신께서 사마리아에 계시는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주인님의 나병을 고쳐 주실 텐데요.”

4 그래서 나아만은 자기 주군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가 이러이러한 말을 하였다고 아뢰었다.

5 그러자 아람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이스라엘 임금에게 편지를 써 보낼 터이니, 가 보시오.”

  이리하여 나아만은 은 열 탈렌트와 금 육천 세켈과 예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 이스라엘 임금에게 편지를 전하였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편지가 임금님에게 닿는 대로, 내가 나의 신하 나아만을 임금님에게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나병을 고쳐 주십시오.”

7 이스라엘 임금은 이 편지를 읽고 옷을 찢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시는 하느님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다니!

  나와 싸울 기회를 그가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

8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는 이스라엘 임금이 옷을 찢었다는 소리를 듣고, 임금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을 전하였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9 그리하여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 대문 앞에 와서 멈추었다.

10 엘리사는 심부름꾼을 시켜 말을 전하였다.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11 나아만은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며 말하였다.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

12 다마스쿠스의 강 아바나와 파르파르는 이스라엘의 어떤 물보다 더 좋지 않으냐?

 그렇다면 거기에서 씻어도 깨끗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 나아만은 성을 내며 발길을 옮겼다.

13 그러나 그의 부하들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14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15 나아만은 수행원을 모두 거느리고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 그 앞에 서서 말하였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반응형

사순시기 사진

 

2024년 3월 4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복음

 

복음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4ㄴ-30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반응형

 

 

2024년 3월 4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오늘의묵상 사진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 내용이 매우 훌륭하고 권위가 있어 모두 놀라는데, 오히려 그 경이로움이 예수님을 ‘환영받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예수님의 가정환경과 성장 과정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고향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놀라운 가르침이 나오자 이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알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유다인들’의 모습과 대조되는 ‘믿는 이방인들’의 모습이 제1독서에 제시됩니다. 존경받던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불치병에 시달렸지만, 오랜 고통의 시간을 지나 결국 치유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처음에는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는 말에 황당해하며 화를 내었지만, 놀랍게도 그의 부하들은 대범하게 권유합니다.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느님 말씀에 대한 단순한 믿음과 순명이 불가능한 치유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의 앎이 과도한 확신으로 왜곡될 때 주변은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됩니다. 더구나 그 앎이 비교나 질투, 열등감을 기반으로 할 때 그 앎은 극단의 폭력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믿지 못함’은 죽음으로 이어지고 ‘믿음’은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요르단 물은 나아만의 몸만 고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에 대한 진정한 앎(인식)은 그의 의식과 마음까지 낫게 하여 준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반응형

 

 

 

사순 3주간이 되면서 전례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셔야 할 이유를 하나하나 전합니다. 

어제 주일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심으로 죽음을 재촉하신 얘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과부와 나병 환자만 고쳐 주시는 분이 아니라 이방인인 나아만과 과부도 구해주신 분이라고 하여 죽음을 재촉하신 얘기입니다.

성전 정화를 하지 않으셨으면, 이런 얘기를 하지 않으셨으면, 주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을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으면 어제 말씀드린 대로 사람들이 치우라는 말씀대로 잡것을 치웠다면, 주님 말씀을 듣고 민족 편견적인 믿음을 깼다면 주님께서 돌아가시지 않을 수 있었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인간의 잘못된 믿음들이 여럿 드러납니다.

우선 이미 말씀드린 대로 민족 편견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편견이 본래 나쁜 것이지만 편견적인 믿음은 더 나쁜 것이고, 편견도 다른 편견이 아니라 민족적인 편견은 더더욱 나쁜 것이지요. 하느님께 대한 다른 민족의 믿음은 틀려먹었고 자기들의 믿음만 옳다는 편견, 하느님께서 자기들만의 하느님이시고 다른 민족은 사랑치 않으신다는 편견에서 더 나아가 다른 민족을 사랑하셔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실은 믿음도 아닐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셔서도 안 되겠지요?

나아만의 믿음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많이 부족한 믿음이지요. 그는 치유를 받기 위해 엘리사에게 가는데 이스라엘 종의 말만 믿고 갑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종의 말만 믿고 갔으니 대단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이랄까 믿음으로 간 것이고, 하느님을 믿고 간 것이 아니라 종이든 엘리사든 인간을 믿고 간 것입니다.

그가 하느님을 믿지 않고 엘리사를 믿었다는 표는 엘리사가 자기의 치유를 위해 적극성과 정성을 더 보여 주기를 바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의사가 치유해주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의사가 치유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면 굳이 하느님께서 치유해주시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고, 의사가 얼마나 능력에 노력을 더하는지 그것을 볼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의사를 통해 고쳐 주시는 거라고 믿으면 의사의 능력이나 노력이나 정성은 그리 중요치 않을 겁니다.

 주님께서 칭찬하신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집에까지 오실 필요도 없고 자기 종의 이마에 손을 얹어주실 필요도 없다고 믿었습니다. 나아만은 또 요즘 자연 치유자들이 주장하듯 좋은 물이 치유해 줄 거라는 믿음도 비칩니다. 그래서 요르단강 물보다 자기 나라 강물이 더 좋다고 하고, 물로 씻는 세례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물이 치유해 준다고 믿습니다.

나아만은 또 치유를 받기 위해 자기의 정성도 극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기 정성이 부족하면 하느님께서 치유해주지 않으실 거라고 믿는 것이고, 결국 하느님 은총의 무상성 곧 거저 주시는 하느님 사랑을 믿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엄마가 아들에게 밥을 줄 때 아들이 하는 짓 보고 줍니까?

예쁜 짓 하면 주고 미운 짓 하면 주지 않습니까?

먹고 싶어 하면 주고 먹기 싫어하면 안 주는 것 아닙니까?

필요하면 주고 필요치 않으면 주지 않는 것 아닙니까?

 인간의 정성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는 조건이 아니라 무상으로 주시는 은총을 우리가 받는 조건임을 “이제야 저는 알았습니다.”라고 한 나아만처럼 이제라도 깨닫는 오늘 우리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OFM 작은 형제회)

반응형

 

 하느님 말씀 안에는 구원하는 힘이 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 말씀이었다. 그분을 만난 이는 모두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스치듯 지나치거나 우연히 만난 이들이 아니었다. 그분을 마주했고, 간청했고,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다.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매우 단순했다.

대부분 말씀만으로 그들을 회복시켰다. 행위라고 해봐야 기껏 손을 대거나 잡아 일으켜 세워 주는 정도였다. 말씀도 어떤 요란 주술이 아니라 지극히 단순한 명령이었다. ‘일어나가거라.’, ‘돌아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정도였다.

하느님 말씀을 말 그대로 하느님이 우리가 아니라 바로 나 개인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대로 실천하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는다. 이미 이 세상 안에 들어와 있는 하늘나라를 체험한다.

 

  시리아 장수 나아만은 나병환자였다. 그는 치료받기 위해 엄청난 규모의 선물을 들고 엘리사 예언자를 찾아갔다. 그런데 예언자의 처방은 지극히 단순했다. 요르단강물에 일곱 번 몸을 씻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모욕처럼 느꼈다. 자신의 몸을 보지도 않고 심지어 대면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 강은 동네 개천 같은 작은 강이었다. 그는 모욕감에 그냥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마음을 바꿔 예언자의 지시대로 했다. 그래서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그는 몸을 씻은 게 아니고 하느님 말씀에 복종한 것이다. 그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이 그를 회복시켜 주셨다.

  만일 성당에 도둑이 들어와 감실을 열어봤다면 크게 실망할 거다. 금 그릇에 담긴 게 고작 작은 빵이니 말이다.

우리 믿음은 그렇게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하다.

어린이가 부모에게 순종하듯 하느님 말씀을 그렇게 따르기를 바란다. 하느님 말씀이 사람이 되셨고, 그분이 이제 작은 빵이 되셨다. 세속적인 기준이라면 그 빵은 매우 특별하게 만들어져야 하고 지금처럼 자주 또 쉽게 먹을 수 없을 거다. 먹는다고 해도 일주일 단식 정도는 해야 할 거다. 믿을 수 없어 믿는다.

하느님의 숨 막히는 겸손과 차고 넘치는 사랑을 믿는다. 믿는 대로 순종하고 실천하기를 바란다.

예수님, 제 노력이 아니라 순전히 주님의 호의로 구원됩니다. 보속 극기 단련은 단지 그런 제 믿음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제멋대로 살지 않고 주님 말씀에 단순하게 복종하겠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말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하느님을 무한히 신뢰하는 마음을 심어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반응형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면 두 가지 등급이 좋아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수능 시험 등급이고, 또 하나는 내신 등급입니다.

그런데 엄마들이 보는 자식의 등급이 있다고 해서 이렇게 적어봅니다.

 

1등급 : 공부를 잘한다.

2등급 : 공부는 못하지만, 성격이 좋다.

3등급 : 공부도 못하고 성격도 나쁘지만, 건강하다.

4등급 : 지 아빠 닮았다.

 

 공부 잘하는 것이 1등급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만, 아이를 위한 엄마의 마음을 볼 수 있어서 뭐라 하기도 뭐 합니다. 하지만 성적을 위해 학원 열심히 다니고, 각종 스펙을 쌓느라고, 성격도, 건강도, 또 가족 간의 사랑도 잃는다면 성적과 스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런데 하느님 나라는 오히려 4등급을 맞아야 갈 수 있습니다. 즉, ‘지 아빠’인 하느님을 닮아야 그 나라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과는 다른 하느님 나라에 가는 기준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은 잊어버리고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회당에 가셔서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회당에 있던 고향 사람들은 이 말씀에 화가 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렙타의 과부 이야기,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통해, 더 화가 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선택된 자기들만 당연히 구원받아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은총이 넘어감을 이야기했다고 화가 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4등급을 맞아야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 아빠’인 하느님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얼굴만 닮으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따라야 진정으로 닮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화를 불러일으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회개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구원의 길에 들어가는 은총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이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몹니다. 심지어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지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갑니다. 그들은 구원의 은총을 걷어찼습니다. 겸손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 김대건성당 주임)

 

반응형

 

 

 

 

 

“주님,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당신의 거룩한 산, 당신의 거처로 데려가게 하소서.”(시편 43,3)

 

감로수(甘露水) 같은 ‘시대의 현자’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으로 오늘 강론을 시작합니다.

새벽 교황님 홈페이를 여니 새롭게 마음에 와닿은 말마디들입니다.

 

“교황은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우리의 집을 짓도록’ 격려했다.”

“무장해제는 도덕적 의무이다.”

“우리 모두 말하도록 하자: “충분합니다!”, “좋습니다!”

(Let us all say: “Enough!”, “please!”)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다'라는 철학책 제목이 생각납니다. 이 책 중 나오는 내용을 인용합니다. ‘동양의 지혜는 역사 없이 존재한다. 이는 곧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다는 뜻이며, 특정한 관념에 의해 역사를 고정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변화하는 역사는 역사를 가질 수 없다. 공자를 비롯해 동양의 현자들이 세상에 대해 그 어떤 편견적인 시각을 투사하지 않으면서도 그 세상 자체에 접근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의 무지로부터 자유로울 자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동양의 현자들과는 달리 성서의 현자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의 무지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하느님과 깊어지는 우정과 더불어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날로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바로 그 대표적 인물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제1독서 열왕기하권의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 예언자입니다. 우선 제1독서의 나아만의 치유과정을 통해 우리의 무지의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에 대해 살펴봅니다.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환자였다.’

오늘 제1독서는 나아만의 나병치유와 더불어 선입견과 편견의 무지의 병의 치유과정을 보여줍니다. 무지의 치유에 깨어있는 마음, 열려있는 마음의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어쨌든 나아만에게는 나병이 무지의 병의 치유에 전화위복이 되었음을 봅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사로잡아온 소녀가 구원의 도구 역할을 할 것을 누가 알았겠는지요! 이 또한 우리의 선입견을 깹니다.

 사소한 작은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대해서는 안됨을 배웁니다. 나아만의 방문에 두려움에 떠는 아람 임금 또한 무지의 두려움을 반영합니다. 자기만의 편견과 오해로 상황을 재단하고 절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의 등장입니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할 것입니다.” 나아만의 방문에도 전혀 두려움이 없이 의연한 엘리사는 참으로 무지로부터 자유로웠음을 봅니다. 엘리사는 심부름꾼을 시켜 말을 전합니다. 이 또한 나병의 치유와 더불어 나아만의 근본적 무지의 병인 허영과 교만의 치유를 목표로 하고 있음을 봅니다.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 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말 그대로 겸손과 순종의 시험입니다. 나아만이 화를 내고 발길을 돌리면서 하는 말들이 그의 굳어진 선입견, 편견, 교만을 보여줍니다. 나병에 앞서 나아만의 편견과 선입견, 그리고 교만의 무지의 병이 심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돌려 부하들의 간청대로 엘리사의 조언대로 겸손히 순종하여 따랐을 때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집니다. 어린아이 같은 새살은 어린이 같은 순수한 마음을 상징합니다. 무지의 치유에 순종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만남으로 나병의 치유와 더불어 편견과 선입견의 무지의 병도 치유된 나아만의 하느님 고백입니다. 참으로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치유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해 깨어 있는 마음, 열린 마음으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날 때 육신의 치유와 더불어 무지의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나병의 치유와 더불어 주님을 만남으로 참으로 겸손해졌을 나아만은 온전한 건강의 참사람이 되었음을 봅니다. 나아만은 나병과 더불어 무지의 병까지 치유되게 만들었으니 전화위복입니다. 흡사 화답송 후렴 시편이 무지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영혼의 부르짖음처럼 들립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이까?”(시편 42,3)

 무지에 대한 답은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만남뿐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육신의 병보다 더 심각한 것은 무지의 병입니다. 탐욕, 질투, 절망, 원망, 미움, 분노, 두려움,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 어리석음, 전쟁 등 끝없이 이어지는 부정적 마음의 현상들 무지로 인해 파생된 징후의 병들입니다. 참으로 이런 무지로부터 자유로워진 이들이, 마음속 괴물들을 잘 길들인 이들이 현자요 예언자요 성인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무지로부터의 해방의 여정, 치유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육신의 병도 대부분 이런 무지의 병으로부터 기인됩니다.

 오늘 복음도 예수님은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의 무지의 병에 대해 성찰하게 합니다. 나자렛 고향 회당에 모여있던 고향사람들에게도 예수님께 대한 선입견의 무지의 병이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이 됩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편견과 선입견, 질투에 사로잡힌 무지한 인간의 한계요 인간의 보편적 부정적 현상입니다. 무지에서 벗어나 참으로 자비롭고 지혜로워 겸손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세상 연옥에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무지로 인한 아비규환, 각자도생, 승자독식의 참 생존경쟁 치열한 참으로 혼란한 세상 전쟁터입니다.

  주님은 엘리야 시대 시돈 지방 사렙타 과부의 예를 들면서, 또 엘리사 시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예를 들면서 고향 사람들은 물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하느님께는 차별이 없고 일체의 기득권도 무용지물입니다. 엘리야 시대의 사렙타 과부처럼, 엘리사 시대의 나아만처럼 겸손히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순종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고향 사람들의 반응이 점입가경입니다. 무지의 병이 얼마나 깊은지 화가 잔뜩 난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 합니다. 흡사 바위에 계란치기처럼 무지의 바위처럼 생각되는 나자렛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참으로 외롭고 고독했을 예수님은 이런 과정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무지의 늪에서 벗어나 홀가분하게 떠나시는 대자유인 예수님이십니다.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의 무지가 문제입니다. 유일한 답은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인 회개뿐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회개의 여정과 함께 가는 무지의 병의 치유 여정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보다 무지의 병에 좋은 치유제는 없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가오리다. 제 기쁨과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오리다. 

하느님, 저의 하느님, 당신을 찬송하오리다.”(시편 43,4).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반응형

 

 

 

찬미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 말씀을 펴시고 말씀하실 때 처음 회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그분의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 고을 출신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하고 말씀하시며 정확히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분노한 그들은 예수님을 벼랑 끝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이들은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왜 예수님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분노해야만 했을까요?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에서 세상을 자신의 기준으로만 판단하는 우리의 교만과 편견에 대해서 성찰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판결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모든 상황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없는 '내면의 두려움'에서 처음 시작됩니다. 두려움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면 변하지 않는 안정된 자신만의 틀과 기준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틀에 가둬 놓을 수 없는, 감당할 수 없는 충동, 죄책감, 열등감 등은 회피하게 됩니다. 그러나 통나무를 아무리 꾹꾹 눌러도 물 위에 떠오르듯이 이런 감정들은 회피해도 오히려 불안과 우울함, 분노의 증상을 낳게 합니다.

 성경에서 '보다'라는 단어는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고 함께 머물다'는 더 높은 차원을 의미합니다. 보기 싫은 것을 회피하고, 보고 싶은 것만 피상적으로 보는 것으로는 '자신의 내적 모순'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또한 예수님을 순수하게 느끼고 체험하는 것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 됩니다. 이 장벽 뒤에 자신의 나약함을 숨기고 싫은 것들을 밀어내며 자신도 모르게 더욱 좁은 편견에 갇히게 됩니다. 이 편견으로는 나의 고통과 분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불행과 두려움의 원인을 상대방 탓으로 전가하며 그 해답을 찾으려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의 출발점은 사실 상대방의 탓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과 태도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무한한 은총을 주시지만, 우리 가장 밑바닥에 있는 우리의 열등감, 두려움, 편견이 이 거룩한 은총을 항상 방해하고 있습니다.

절벽 아래에 내 집이 눈앞에 보인다고 해서 집에 다 온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는 능선을 따라 몇 날 며칠을 걸어야 도착할 만큼 아주 먼 거리에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오래 앉아서 내 나름대로 그 집을 쳐다보고 넓이와 길이, 색깔과 자재의 종류를 외우고 구조를 파악해 보아도 실제로 물리적 거리는 그 집에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습니다.

 자신만의 편견과 지식으로 하느님과 가깝다고 여기는 것은 실제 물리적으로 가까운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만의 생각에서 하느님과 가깝다고 느끼는 심리적 거리일 뿐입니다.

나의 상처, 보기 싫은 욕망, 실패한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들어있는 내 마음의 심연으로 가서 거기에 무엇이 있고 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바라보고 성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목표가 코앞에 보이고 원리를 알고 있고 또 분명히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느님 집에 도착하려면 실제로 걷고 또 걸으며 어둠과 갈증, 호기심과 힘든 체험에 직접 부딪혀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나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되고 수정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마련할 수 있게 됩니다.

 편견에 갇히면 감정이 이성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만의 편견에 갇혀 예수님을 벼랑에 끌고 가서 떨어뜨리려고 하는 오늘 복음이 군중들처럼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엘리야가 시돈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고, 또 엘리사 시대에 수많은 나병 환자 중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영혼의 고립과 나병에서 그리고 악마의 유혹에서 또 스스로의 편견과 의심, 자기기만에서 얼마나 빠져나오기 힘든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왜곡되고 편향된 영혼 안에서 예수님은 유유히 걸어가십니다.

 존 시어러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실에서 회피할 수 없는 것을 하느님 안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성령은 우리의 닫혀 있고 갇힌 마음 안에서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춤과 노래를 선사해 주실 수 없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마음에 유유히 걸어오시는 예수님께 의지하고 또 우리 자신의 모순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우리의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동규 바오로 신부님, 의정부교구/ 서울대교구 대신학교 영성부장)

 

반응형

 

 

평화를 빕니다.

우리는 가까이 있는 것이 소중한 줄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산이나 바다, 관광지에 그렇게 열광하지 않고 무관심하게 되고는 하는 것 같습니다. 익숙하기 때문에 언제라도 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또는 게으름 때문에 찾아가지 않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관광을 가게 되면 그곳의 관광지에 열광을 하게 되죠.

 

  건강을 잃었을 때 또 건강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건강할 때는 건강의 소중함을 잊고 지내기 쉽습니다. 하지만 건강을 잃게 되면은 건강을 되찾고자 간절히 바라고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노력을 하게 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이방인인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지만 나병 환자였습니다.

건강을 잃고 건강 회복을 간절히 바랐던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로부터 이스라엘의 예언자가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의 주군에게 부탁하여 이스라엘로 갑니다 나병을 고쳐달라는 청을 받은 이스라엘 임금은 자기가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하느님이냐며 힘들어합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이 힘들어한다는 얘기를 듣고 엘리사 예언자는 임금에게 나아만을 자기에게 보내라고 말을 전합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의 집 대문 앞에 오자 엘리사는 심부름꾼을 시켜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면 나병이 나을 거라고 말을 전합니다. 나아만은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며 말합니다. 나아만은 당연히 엘리사 예언자가 나와서 그의 주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자기의 나병을 고쳐주려니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마스쿠스의 강은 이스라엘의 어떤 물보다 좋지 않냐고 성을 냅니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이 말리며 엘리사 예언자가 시키는 대로 한번 해보라고 조언합니다. 나아만는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준 대로 요르단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그자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낫게 됩니다.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참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나아만이 나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병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여정에 있어서 도움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아쉬운 게 없었기 때문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율법을 아주 어렵게 만들고 다른 일반 사람들은 지키지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더 어려운 일을 요구하는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서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병들어 신음하는 백성을 구원하시려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병에서 낫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지, 더 나은 신앙인으로 변화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신앙 공동체에서도 우리는 소중함을 믿고 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옛날의 이야기 옛날 이야기가 있죠. 어떤 수도원에 성소자가 줄어들어가지고 수도원이 문을 닫을 위기가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근처에 아주 지혜로운 랍비가 왔다는 얘기를 듣고 수도원장 신 수사님께서 지혜로운 랍비를 찾아가서 수도원의 어려움을 얘기하니까 그 랍비가 하는 말씀이 "그 수도원 형제들 중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랍비의 말을 전해 들은 수도원 형제들은 우리 수도원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형제들이 그리스도일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하고 서로를 존중하면서 이렇게 지내다 보니까 분위기도 좋아지고 그래서 성소자가 다시 많이 들어와서 수도원이 잘 되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가 있지요.

주님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할 때에 은총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기본은 바로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하죠.

그래서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에 감사드리면서 기쁘게 하느님께 나아가는 그런 시간들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최우식 프란치스코 신부님 미사 강론 중,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반응형

댓글